김선교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 부연구위원(공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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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교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 부연구위원(공학박사) |
타워는 위계(hierarchy) 질서를 말한다. 전력산업은 100여 년 전 탄생 이후, 큰 변화 없이 유지되어왔다. 소수의 전문가 집단은 타워 위에 앉아 알아서 전력을 생산하고 전달해왔다. 절대다수의 소비자는 사용량에 따라 요금을 지불하면 될 뿐이었다. 요컨대, 수직적 위계질서 속에서 정부는 에너지 안보와 산업 발전 등을 고려해 충분한 에너지원이 적절하게 공급될 수 있도록 총괄 책임의 역할을 맡아왔고, 수직통합 구조인 한국전력은 그 계획에 맞추어 발전, 송배전 설비를 구축해 운영해왔다. 2001년, 발전시장에 경쟁이 도입되어 한전의 발전 부분은 자회사로 분리되고 민간 발전회사가 출현하였지만 큰 틀의 변화는 없었다.
그러나 전력산업이 큰 변화 없이 그 위계를 오랫동안 유지하는 동안, 세상은 많이 변했다. 그 변화의 상징은 바로 ‘인터넷’이다. 인터넷 또는 이를 위시한 ICT 기술은 많은 산업의 위계질서를 붕괴시켜 탈중앙, 분산화 형태의 네트워크 체계를 확산시켰다. 니얼 퍼거슨은 여기서 주목해야 할 사실은 "인터넷이 위계질서를 붕괴시켰다"라는 게 아니라 "위계의 한계에 이르자 새로운 대안으로 인터넷과 네트워크가 부상했다"이라고 강조한다.
사실, 현재 전력산업 구조는 어쩌면 역사상 최초로 그 틀을 뒤흔드는 변화의 과정 중에 놓여 있다. 여기서 가장 큰 변화는 수동적인 역할에 한정되었던 소비자가 전력산업을 주도하는 생산과정에 참여하는 데 있다. 이러한 변화는 100년이 넘는 전력산업 역사상 초유의 일이다.
기존 전력산업 위계는 이러한 변화에 더 이상 적합하지 않다. 왜냐하면, 기존 위계는 ‘안정적이고, 예측 가능한’ 사업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다양한 참여자의 등장으로 ‘복잡하고 불확실하며 급변하는’ 새로운 요구 조건을 충족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질서, 체계가 필요하다. 심지어, 20년 전 시장화라는 나름의 큰 변화를 겪었던 미국, 유럽 전력회사 역시 프로슈머로 대표되는 ‘탈중앙화’라는 거대한 변화 앞에 우왕좌왕하며 변화의 주변부에 머물고 있다.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도태되어 소멸할 수도 있다는 심각한 위기 인식 가운데, 가장 큰 문제를 위계체계에 익숙해져 버린 전력산업 문화에 있다고 분석하는 일각의 시선이 있다. 수십 년 동안 안정성을 지켜주던 위계와 폐쇄적인 조직 문화는 새로운 변화 속에서 생존을 위협하는 주요한 원인이 되고 있다.
전력산업의 혁신을 이끄는 산업 내부의 스타는 120년 전 에디슨 이후 눈에 띄지 않는다. 새로운 변화 속에서 에너지 산업, 전력산업에 주목받는 스타는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는 혁명가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와 소프트뱅크의 손정의이다. 아마, 새로운 스타가 변화가 진행되고 가속될수록 다른 산업, 새로운 영역에서 계속해서 등장할 것으로 예상된다. 오래된 산업 내부에서 스타가 등장하기란 어려운 법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떨까? 변화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을까? 전력산업을 주관하는 산업부와 한국전력, 발전자회사, 유관 정부기관들은 변화의 동기가 있을까? 아니면, 그 위계질서를 유지하며 피라미드 꼭대기 위에서 얻을 수 있는 이익에만 관심이 여전히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닐까?
전력산업의 문화가 미래에 적합한지 그 생태계의 중심에 있는 모두에게 묻고 싶다. 미래를 위한 우리의 마음의 준비는 충분한 것일까? 새로운 것을 만들기보다는 기존의 계획을 새로운 것처럼 꾸미는데 익숙한 전력산업의 이야기가 계속 반복된다면 우리에게 미래는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새로운 변화는 수많은 실패 위에 가능해진다. 실패했을 때, 책임 소재를 먼저 고민하는 위계체계에서 새로운 변화를 위한 시도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현재를 유지하는 일’에 익숙한 위계질서는 큰 변혁의 흐름 속에 그 한계를 나타낼 수밖에 없다. 결국, 변화가 시작되고 확산되기 위해서는 위계의 붕괴가 필요하다. 새로운 세상을 열기 위해서는 변화를 거부하는 오래된 관습과 문화를 스스로 파괴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