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철(한국공인회계사회 사회공헌·홍보팀장) |
규제없는 정부는 없다. 그럼에도 새정부가 출범할 때마다 외친다. "규제혁파, 규제혁신을 통해, 규제를 획기적으로 없애거나 줄이겠다"고. 그러나 현실은 어떤가. 시대의 큰 흐름과 상황에 맞지 않는 과도한 규제가 계속 늘어나고 있다. 규제가 신산업 성장을 막고 생태계를 멍들게 하고 있다. 속도가 생명인 스타트업에게 규제 장벽은 ‘사업을 하지 말라’는 일종의 경고 메시지로 들린다. 모험을 감수하며 빠르게 움직여야 하는 그들에게 기업가정신과 사업의지 마저 꺾어버린다.
지난해 우리 입에 많이 오르내린 ‘규제 샌드박스’. 신산업, 신기술 분야에서 새로운 제품, 서비스를 내놓을 때 일정 기간 동안 기존의 규제를 면제 또는 유예시켜주는 제도다. 아이들이 바닷가나 놀이터 모래밭에서 집을 만들거나 성을 쌓는 등 자유롭게 놀이를 하는 것에서 따왔다고 한다. 샌드박스 공간 안에서는 자유로운 창작이 가능한 모래상자 놀이터처럼 규제 없는 환경을 조성해준다는 의미다. 규제 샌드박스 제도는 영국, 홍콩, 싱가포르, 호주 등에서 운영되며 효과를 증명했다. 영국 금융행위감독청 (FCA)은 2016년부터 이 제도를 도입, 핀테크 스타트업 선별과 육성을 시작했다. 싱가포르도 영국을 밴치마킹해 싱가포르 통화청(MAS) 산하에 핀테크 전담팀을 두고 운영 중이라고 알려져 있다.
또 ‘갈라파고스 규제’가 있다. 세상과 단절되어 독특한 동ㆍ식물 구성을 이룬 갈라파고스 제도(Galapagos islands)처럼, 변화하는 국제정세와 동떨어진 특정지역에만 있는 규제라는 이유에서다. 갈라파고스 신드롬은 일본을 넘어 어떤 나라에서든 국제 표준을 무시하고 독자적인 발전 경로를 걷는 그 무엇에 대해서 사용된다. 미국의 경우 크레딧 카드에 퇴물이 되어버린 마그네틱 스트라이프(magnetic stripe)를 여전히 사용하고 있는 것도 일종의 갈라파고스 신드롬이다.
이웃나라 중국을 보자. 신용사회 출발은 늦었지만 핀테크 산업에서 가장 앞선 국가로 꼽힌다. 대표적인 간편결제서비스 ‘알리페이’. 알리바바가 만든 알리페이는 2011년 5월 제3자 지급결제 서비스를 시작해 지금은 매달 5억명이 쓰는 서비스로 발전했다. 글로벌 회계법인 KPMG에 따르면 2018년 기준 세계 10대 핀테크 중 4개가 중국 기업이다. 30위권 내에 중국은 8개, 미국은 7개나 포진해 있지만, 한국은 ‘토스’를 서비스 중인 ‘비바리퍼블리카’가 28위에 올랐을 뿐이다. 국내의 그물망 규제가 우리 핀테크산업의 현주소를 말해준다.
문재인 정부에서 규제 샌드박스를 채택했다. 규제개혁 방안 중 하나다. 사업자가 새로운 제품, 서비스에 대해 규제 샌드박스 적용을 신청하면 법령을 개정하지 않고도 심사를 거쳐 시범 사업, 임시 허가 등으로 규제를 면제, 유예해 그동안 규제로 인해 출시할 수 없었던 상품을 빠르게 시장에 내놓을 수 있도록 한 후 문제가 있으면 사후 규제하는 방식이다.
이제 우리에게도 규제혁신의 희망이 보인다. 지난해 ‘금융혁신지원 특별법’이 국회를 통과, 올해 4월부터 혁신금융서비스 지정제도(규제 샌드박스)가 시행되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그동안 금융 규제에 발이 묶인 국내 핀테크 기업은 한 단계 점프할 수 있는 기회"라고 평가한다. 규제를 완화해 먼저 산업을 육성하고 문제가 발생하면 관리·감독을 강화하는 네거티브 규제 방식의 중국을 꼼꼼히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촘촘한 규제는 창업의지의 날개를 꺾는다. 유망 스타트업인 ‘유니콘기업’(10억달러 이상 가치를 가진 10년내 비상장 스타트업)이 국내에서 보이지 않는 이유다. 규제 샌드박스 도입은 비록 늦었지만 반갑기만 하다. 제대로 작동된 규제 샌드박스가 스타트업의 모험정신을 살리고, 퍼스트펭귄들도 많이 등장시키기를 기대한다. 그래야 창업생태계가 건강해지고 우리경제에도 활력이 돋아 희망을 이끄는 한해로 기억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