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병무 금융증권 에디터
희극인들이 들으면 기분 나쁘겠지만, 일어나지 않아야 할 일이 발생했을 때 ‘코미디 같다’라는 관용표현을 쓴다. 황당하다 또는 어이없다와 거의 같은 뜻으로 사용한다. 러시아와 유럽 사이에 있는 인구 6000만명의 우크라이나에서 드라마틱 코미디가 벌어졌다. 대통령 선거 결선투표에서 정치 풋내기 볼로디미르 젤렌스키(41)가 재선에 도전한 현직 대통령을 꺾고 승리했다. 젤렌스키는 자신이 출연한 드라마 속의 주인공처럼 ‘미스터 프레지던트’에 오르는 신화를 썼다. 우크라이나 선거관리위원회는 결선투표 개표가 95% 진행된 23일 오전 현재 젤렌스키가 73.17%를 득표했다고 발표했다. 그와 맞붙은 페트로 포로셴코(53) 대통령은 24.50%를 얻는 데 그쳤다.
젤렌스키는 어려서부터 예능의 끼가 대단했다. 키예프 국립 경제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했지만, 재능을 살려 코미디언으로 방향을 틀었다. 배우, 프로듀서, 영화감독, 시나리오 작가 등으로 영역을 넓히며 만능 엔터테이너로 활동했다. 그에게 국민배우 명성을 안겨준 작품은 TV 드라마 ‘국민의 종’. 2015년부터 방영돼 두 차례의 시즌을 마치고 지난달부터 세 번째 시즌이 시작됐을 만큼 빅히트 하고 있다. ‘국민의 종’은 부패한 정권을 신랄하게 비판한 고등학교 역사 교사가 하루아침에 대통령이 된다는 스토리를 담고 있다. 극 중에서 그가 욕을 섞어가며 정부의 부정을 비판하는 모습을 한 학생이 휴대전화로 몰래 촬영해 인터넷에 올린다. 이 동영상이 SNS를 타고 선풍적 인기를 끌고, 제자들의 설득에 못 이겨 재미 삼아 대선에 출마해 당선된다. 깜짝 대통령이 된 그는 부패 정치인과 재벌을 척결하는 개혁 정치를 펼친다. 드라마 속 대통령 취임 연설에서 "정치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른다"면서도 "하지만 하나는 안다. 나중에 아이들의 눈과 부모들, 여러분 모두를 볼 때 부끄럽지 않게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 그것이다"라고 역설한다.
젤렌스키는 드라마 제목에서 이름을 따 ‘국민의 종’이란 정당을 만들어 지난해 12월 대선에 출마했다. 때 묻지 않은 정치인에 대한 갈망이 높아 지면서 정치 무경험은 오히려 장점이 됐다. 기업인이나 유력 정치 가문이 아닌 교수 집안에서 자수성가한 이력도 보탬이 됐다. 하지만 젤렌스키 당선의 1등 공신은 기성 정치인에 대한 국민의 깊은 불신과 염증이었다. 부패와 무능으로 경제 사정이 나빠지자 아웃사이더에게 표를 던졌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병합하고 동부 지역(돈바스 지역) 친러시아 분리주의자들과 내전이 한창이던 2014년 경제성장률이 -6.6%로 떨어졌다. 2015년에는 -9.8%까지 하락했다가, 2016년부터 2018년까지는 연 2∼3% 성장률을 회복했다. 그러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여전히 유럽 최빈국 수준인 2656달러(2017년)다. 연간 물가상승률은 10%에 달한다. 지난해 12월엔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39억달러(약 4조4400억원)의 구제금융도 받았다. 이런 경제 여건이 결국 ‘못살겠다, 갈아보자’로 이어진 셈이다.
젤렌스키가 드라마 속 주인공처럼 성공적으로 개혁을 이끌지는 미지수다. 그가 이스라엘에 망명 중인 금융재벌 이고르 콜로모이스키의 꼭두각시라는 견해도 있다. 실제 많은 전문가들은 젤렌스키를 콜로모이스키가 내세운 후보로 간주한다. 콜로모이스키는 2016년 자신이 소유한 우크라이나 최대 은행 프리바트방크를 포로셴코 정부가 국유화한 데 대해 보복하려고 젤렌스키를 대선 후보로 삼았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이 때문에 일각에선 이번 대선이 우크라이나 최대 재벌 가운데 한 명인 콜로모이스키와 역시 갑부 기업가 출신의 대통령인 포로셴코의 대결이었다는 해석이 나온다.
남의 나라 상황을 우리나라에 빗대는 것이 유쾌하지 않지만 묘하게 오버랩된다. 한국은행에 이어 국내 경제연구기관들이 일제히 올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낮췄다. 한국은행은 지난 18일 2.6%에서 2.5%로 0.1%포인트 내렸다. 21일엔 LG경제연구원이 2.5%에서 2.3%로 하향 조정했다. 국내 경기가 금융위기 이후 가장 빠른 속도로 내림세를 보이고 있다는 판단에서다. 여기저기서 힘들다고 아우성이다. 그런데도 뾰족한 대책이 없어 화가 난다. ‘한국판 젤렌스키’가 탄생하지 말란 법은 없다. 그래서 슬픈 코미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