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E칼럼] 회색인을 찾아서

에너지경제신문 입력 2017.10.17 09:06

김세원 가톨릭대학교 융복합전공 교수


김세원

영국왕 찰스2세는 왕위에 오른 뒤, 청교도 혁명 당시 부왕 찰스1세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재판관 등 58명 명단을 만들어 이 가운데 13명을 처형하고 25명을 종신형에 처했다. 명단을 적은 종이에 죽음을 뜻하는 검은색 커버를 씌웠다고 해서 ‘블랙리스트’로 불렸다. 감시가 필요한 위험한 인물들을 적어놓은 목록을 가리키는 블랙리스트의 어원은 이처럼 ‘살생부’에서 시작됐다. 주로 정적들을 제거하거나 보복하기 위해 사용되던 블랙리스트는 다양한 분야에 등장했다. 19세기 미국에선 파업한 노동자들의 이름을 적은 명단을 블랙리스트라고 했다. 반대로 노동조합도 조합에 대한 부당노동행위가 두드러진 기업이름을 명부로 작성해 블랙리스트라고 지칭했다. 양쪽이 자신들에게 적대적인 조직과 개인의 명단을 작성하여 블랙리스트라고 한 것. 블랙리스트는 상업적인 스팸메일이나 악성코드를 유포하는 인터넷 정보 제공자(ISP)의 주소 목록을 뜻하기도 한다. 불법 사이트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남에 따라 블랙리스트의 지속적인 업데이트 작업이 한계에 이르면서 공신력이 있고 안전한 IP 주소를 따로 분류한 ‘화이트 리스트’가 등장했다.

그런가 하면 얼마 전 유럽항만국 통제협력체의 평가 결과 한국이 ‘그레이 리스트(Grey List)’로 추락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이 기관은 선박의 안전관리 상태 등을 종합적으로 평가해 선박의 국적 국가를 블랙리스트, 그레이리스트, 화이트리스트로 구분하는데 그레이 리스트에 오르면 항만국통제가 강화된다.

‘그레이 리스트’란 단어가 아득한 독서의 기억을 불러낸다. 대학 1학년 여름방학 때 우연히 알게 된 최인훈에 매료돼 그의 소설들을 섭렵했는데 그중에 ‘회색인’이 있었다. 시간적 배경은 6.25전쟁이 휴전한지 5년이 지난 1958년 가을. 흑백논리만이 존재하는 사회에서 집단이 추구하는 이념을 추종하기를 거부하고 개인으로 살고자 하는 주인공 독고 준을 최인훈은 ‘회색인’으로 정의한다. 전쟁와중에 고향 북한을 떠나 남한으로 왔으나 민족주의를 앞세운 북한의 독재정권과 부패로 얼룩진 남한의 민주주의 모두에 실망하고 정신적으로 방황하는 독고 준은 작가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최인훈이 회색인을 바라보는 시각은 비관적이다. 그는 설령 이념이 다른 정권이 들어서 흑이 백이 되어도 회색인들이 설 자리는 없다고 단언한다. 흑과 백 어디에서도 그들에게는 문을 열어주지 않고, 어떤 기회도 주지 않는다. 살아있는 권력에 빌붙는 기회주의자와는 달리 회색인은 끊임없이 권력과 거리를 두기 때문이다. 사실 ‘회색인’이라는 말은 이념 대립이 치열한 한국에서 경멸적인 의미로 사용되어 왔다.

블랙리스트, 화이트리스트로 나라가 시끄럽다. 검찰은 이명박 정부 시절의 ‘문화예술·방송계 블랙리스트’ 작성 의혹에 대해 수사에 착수했다. 또 박근혜 정부 당시 청와대가 정권에 우호적인 보수단체를 선별적으로 지원했다는 이른바 ‘화이트 리스트’ 의혹과 관련, 보수단체 10여 곳을 압수수색했다. 이명박 정부 시절 현 여권에 동조하는 연예인들을 분류하여 작성한 명단이 블랙리스트라면 적폐청산은 현 여권이 적으로 규정한 일부 야권, 혹은 보수파들에게 씌운 또 다른 블랙리스트다.

정부가 나서 사회 모든 분야에서 금 긋기, 편가르기에 열중하고 있는 현실은 최인훈이 묘사한 60년 전 풍경과 비슷해 보인다. 권력은 상대를 죽이기 위해 서슴없이 살생부를 만들어 여론 재판정에 세우고 조국과 민족을 내건 개혁에는 복수의 칼날이 춤을 춘다.

역사는 되풀이 된다. 우리의 현대사는 이념의 대립, 적과 동지의 이분법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선량한 사람들이 고통을 겪었으며 발전의 지체 현상이 발생했는지를 말해준다. 하지만 저마다 자신의 자리에서 묵묵히 제 할 일을 하는 수많은 회색인들이 있었기에 전쟁의 폐허를 딛고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북한의 핵·미사일 도발로 인한 일촉즉발의 안보위기 상황에서 과거의 덫에 걸려 제자리를 맴돌고 있는 대한민국을 미래로 이끌고 나가는 이들이 바로 이름없는 이 땅의 회색인들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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