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렉스 틸러슨 국무장관(사진 왼쪽)과 마이크 폼페이오 중앙정보국(CIA) 국장. (사진=AP/연합) |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13일(현지시간) 렉스 틸러슨 국무장관을 전격 경질하고 후임에 마이크 폼페이오 중앙정보국(CIA) 국장을 내정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트위터에 "폼페이오 국장이 우리의 새 국무장관이 될 것"이라면서 "그는 멋지게 일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 "틸러슨 장관의 봉직에 감사한다!"면서 "지나 해스펠이 새 CIA 국장이 될 것이다. 첫 CIA 여성으로 선택됐다. 모두 축하한다!"고 덧붙였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9일 틸러슨 장관에게 물러날 것을 요구했으며, 아프리카를 순방 중인 틸러슨 장관이 일정을 하루 앞당겨 이날 귀국한 것도 이 때문인 것으로 전해졌다.
폼페이오 새 국무장관 지명자는 미 행정부 내 대표적 강경파이지만 최근 남북, 북미 정상회담 성사과정에서 한국 정보당국과 끈끈한 협력을 발휘한 것으로 전해졌다. 해스펠 새 CIA 국장은 현재 CIA 2인자인 부국장으로 과거 테러리스트 심문시 물고문 등 가혹한 수사기법을 사용했다는 논란에 휘말렸던 인물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틸러슨 장관 경질은 북핵사태 해결을 위한 남북 정상회담과 북미 정상회담이 4∼5월에 각각 잡히는 등 한반도 상황이 분수령을 맞은 가운데 나온 것이어서 파장이 예상된다.
석유회사 엑손모빌의 최고경영자 출신인 틸러슨 장관의 낙마설은 사실 오래전부터 제기돼왔다. 지난해 7월 대 아프가니스탄 전략 문제를 두고 충돌하면서 틸러슨 장관이 트럼프 대통령에게 ‘멍청이’라고 발언했던 사실이 알려지고 트럼프 대통령은 이에 ‘아이큐를 재보자’며 응수하면서, 두 사람의 관계는 결별 선언만 안했을 뿐 재결합이 어려울 것이라는 평가가 많았다.
트럼프 대통령과 틸러슨 장관은 지난해 북한 문제를 놓고도 공개적으로 충돌했다. 틸러슨 장관이 지난해 9월 중국 방문 기간 "북한과 2~3개 정도 채널을 열어두고 있다. 그들과 대화할 수 있고 대화한다"고 언급한 데 대해 트럼프 대통령은 트위터를 통해 "훌륭한 국무장관인 렉스 틸러슨에게 그가 ’리틀 로켓맨‘(김정은)과 협상을시도하느라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고 말했다"며 공개 ’면박‘을 주기도 했다. 지난해 12월에는 틸러슨 장관이 "전제조건 없이 기꺼이 북한과 첫 만남을 하겠다"고 하자 백악관이 나서서 "지금은 대화할 시간이 아니다"며 반박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두 사람은 이란 핵협정과 파리 기후변화협약, 러시아 문제 등을 놓고도 이견을 보였다. 트럼프 대통령도 이날 샌디에이고로 가기 전 기자들에게 "나는 틸러슨 장관과 잘 지냈다"면서도 "그러나 실제로 다른 사고 방식을 갖고 있었다. 생각이 달랐다"며 그동안 이견이 적지 않았음을 숨기지 않았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트위터 경질 후 기자들과 만나 "이란 핵협정을 비롯한 문제들을 놓고 틸러슨과 이견이 있었다"고 주요 외교정책에 관한 의견 차이가 경질 배경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CNN 등 미 언론은 정부 관계자를 인용해 "틸러슨 장관은 자신이 왜 해임됐는지 모르며 트럼프 대통령으로부터 직접 경질 통보를 듣지 못했다"고 전했다. 틸러슨 장관의 대변인은 워싱턴포스트(WP)에 "틸러슨 장관은 그의 직책을 강력히 유지하려고 했으며 해임 이유를 모른다"고 확인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트윗 발표’ 를 한 직후 "틸러슨 장관이 경질 이유조차 알지 못한다"는 불만 섞인 성명을 발표한 스티브 골드스타인 공공외교·공공정책 담당 차관도 곧이어 파면 됐다.
외교 수장과 최고위급 외교관의 동반 퇴진으로 국무부 내 차관 이상 고위직은 ‘2인자’ 존 설리번 부장관과 톰 새넌 정무차관만 남게 되는 등 미 정부의 외교 공백 사태는 한층 가중될 전망이다.
틸러슨 장관은 이날 오후 국무부에서 퇴임 기자회견을 하고 "존 설리번 부장관에게 권한을 위임하고 오는 31일 물러나겠다"며 "대북 최대 압박 작전은 거의 모든 사람의 기대를 앞질렀다"고 말했다.
특히 틸러슨 장관의 이탈로 존 켈리 비서실장과 제임스 매티스 국방장관, 틸러슨 장관 등 3인으로 구성된 이른바 ‘어른들의 축’, 즉 즉흥적이고 무모한 트럼프 대통령에게 외교안보를 조언하고 조정해온 축이 사실상 무너지게 돼 향후 미 행정부의 대외정책이 더욱 강경해질 공산이 크다는 전망이 나온다.
미 행정부 내 대표적 강경파인 폼페이오 새 국무장관 지명자는 연초 "김정은이 몇 달 뒤 핵무기를 미국에 보낼 능력을 갖추게 될 것"이라고 밝힌 데 이어 평창동계올림픽을 계기로 남북 간 대화가 시작된 지난달에는 "미국을 위협하기 위해 핵능력을 보유하려는 김정은의 야욕에 전략적 변화가 있다는 조짐은 없다. 남북대화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핵무기 추구에는 변함이 없다고 본다"고 밝혔다.
그는 남북, 미북 정상회담 개최가 합의된 이후인 지난 11일 폭스뉴스 인터뷰에서는 "미 행정부는 회담이 열려 김정은이 미사일 실험이 중단됐다는 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불가역적인 증거를 제공할 수 있기 전에 북한에 제재완화나 어떠한 양보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천명했다.
또 "김정은은 미사일 실험을 중단하고 우리가 한반도 주변에서 하는 군사훈련들을 계속 받아들이며 비핵화 논의를 테이블 위에 올려야 한다"고 덧붙였다.
WP는 "북한과의 민감한 협상 와중에 트럼프 대통령이 그의 안보팀에 중대한 변화를 꾀했다"고 전했다.
3명의 백악관 관리들은 이 신문에 "트럼프 대통령은 틸러슨의 사고방식이 너무 주류적이어서 그와 오래 충돌해왔다"며 "임박한 무역협상뿐 아니라 김정은과의 위험한 대화를 준비하는 지금 변화를 가하는 게 중요하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WP에 보낸 자료에서 "나는 폼페이오 CIA 국장을 우리의 새 국무장관으로 지명해 자랑스럽다"며 "마이크는 웨스트포인트를 그의 반에서 수석으로 졸업했으며 미 육군에서 탁월하게 복무했고, 하버드로스쿨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그는 미 하원으로 가 여야를 넘어 입증된 기록을 남겼다"고 말했다.
한편, 국무장관 경체 소식에 앞으로 두달 안팎 남은 북-미 정상회담에 미칠 영향에도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최측근을 ‘공개 협상’의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북-미 정상회담이 탄력을 받을 수 있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의 전격적인 결정은 오는 5월 김정은 북한 노동당 중앙위원장과의 회담을 앞두고 전열을 재정비하기 위한 목적이 가장 큰 것으로 보인다. 불화설에 휩싸였던 틸러슨 장관을 교체하고, 자신의 ‘복심’으로 통하는 폼페이오 지명자를 ‘음지’에서 ‘양지’로 끌어내 북한과의 협상에 전면적으로 대비하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뉴욕타임스(NYT)도 13일 행정부 고위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트럼프 대통령이 김 위원장과 회담 전에 새 팀을 꾸리기 위해 틸러슨 장관을 교체했다"고 보도했다. 트럼프 대통령도 세라 허커비 샌더스 백악관 대변인을 통해 국무장관 교체 사실을 알리면서 "지난 14개월 동안 폼페이오 국장에 대해 매우 잘 알게 됐다. 이런 중대한 시점에 국무장관에 적합한 사람이라고 확신한다"고 말했다. ‘중대한 시점’은 북-미 정상회담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볼 수 있다.
또,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 8일 한국 대표단을 만난 자리에서 김 위원장과의 회담을 즉석에서 결정한 것 같지만, 한국 대표단이 도착하기 전에 이미 당일 오전 정보기관을 통해 북-미 정상회담 제안을 알고 있었다고 NYT는 보도하기도 했다. 폼페이오 국장이 정상회담 성사에 막후에서 상당한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중앙정보국은 정보기관의 속성상 전면에 나서 협상을 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한계가 있다. 이에 따라 트럼프 대통령이 폼페이오 국장에 아예 공개적인 협상 준비를 지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워싱턴 외교 소식통도 "북-미 대화가 더 탄력을 받을 수도 있다"고 내다봤다.
[에너지경제신문 한상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