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부 송진우 기자. |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세계 각국에서 쏟아질 비난을 알면서도 무리하게 무역확장법 232조에 서명, 수입 철강과 알루미늄에 관세를 가하려 했던 진짜 속내가 드러났다. 20일 블룸버그 통신은 로버트 라이트하이저 미국 무역대표부(USTR)가 관세 면제를 요청한 국가들에게 5가지 전제조건을 제시했다고 보도했다. 미국이 원하는 바를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우리 같이 중국 따돌리자. 동참해주면 내 옆자리에 앉게 해줄게"다.
이는 흡사 과거 학창시절 동네 뒷골목을 꽤나 주름 잡았던, 소위 ‘침 좀 뱉어본’ 아이들이 하던 수법과 닮았다. 미국이 쥔 권력과 영향력을 악용해 자기 사람으로 포섭하려는 모습은 이문열의 소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에 등장하는 엄석대를 연상케 한다. 2001년 이후 16년간 사용하지 않아 사실상 사문화된 무역확장법 232조를 얼토당토않은 이유로 꺼내든 트럼프와 전학 온 한병태에게 대뜸 "물 좀 떠와라"며 심기를 건드린 엄석대는 권력 남용이란 큰 틀에서 일맥상통한다. 철강규제 발표 직후 한국을 비롯해 각국에서 세계무역기구(WTO) 제소를 거론하며 대응하겠다고 밝히자 ‘어디 한번 해볼 테면 해보라’는 식으로 버텼던 트럼프. 소설 속 기차가 다가오는 위험천만한 철길에서 배짱을 겨눠 보자며 목숨을 담보로 악착같이 누워있던 까무잡잡한 중학생의 모습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우리는 현재 선택의 기로에 섰다. 중국과 척(隻) 지는 위험을 무릎쓰고 트럼프의 오른팔 자리에 앉을지, 아니면 부당하다는 명분을 앞세워 관세 부과 대상국 제외 및 WTO 제소를 이어나갈지. 엄석대에 저항했던 전학생 한병태처럼 우리 역시 몇 차례 WTO 제소를 통해 부당한 권력 남용에 맞섰지만, 그 결과는 계란으로 바위치기에 불과했다. 한 통상전문가는 "WTO 제소 이후 조사 및 결과 발표에 걸리는 시간이 최소 1년. 그 기간 동안만이라도 이득을 보고 빠지려는 게 미국의 복안"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미국이 멕시코, 캐나다 그리고 호주를 철강 관세 대상 국가에서 제외했다고 알려지자 세계 각국에서 전략적 선택을 강구하는 움직임이 분주하다. WTO 제소를 전면에 내세웠던 국가들조차 언젠가부터 슬그머니 미국으로 ‘제외 국가’ 요청을 보내는 물밑 접촉에 더 신경을 쓰는 모양새다. 우리 정부 입장에선 한미 FTA 협상과 함께 중국과의 관계까지 신경써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상황은 한층 복잡해졌지만 시간은 촉박하다. 미국의 철강관세 부과 행정명령 발효는 당장 23일부터다.
부당한 권력은 종국에 타락하고 만다. 소설에서 권력으로 일군 학생 친위대는 새로 부임한 선생에게 권력이 기울었다고 판단되자마자 일순간 엄석대 주변을 떠난다. 원인은 알 수 없지만 수십 년이 지난 후 엄석대가 경찰에 연행되는 모습을 끝으로 소설은 마무리된다. 소설에서의 결말이 현 시대에 적용될는지 불분명하다. 지켜볼 뿐이다. 다만 한 가지 자명한 사실은 미국발(發) 무역전쟁 신호탄을 쏘아 올린 트럼프가 이 시대의 엄석대를 자처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