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FTA] 철강 지키고 ‘자동차 미래’ 버렸다

에너지경제신문 입력 2018.03.26 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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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연합뉴스)


[에너지경제신문 여헌우 기자] 우리 정부가 ‘철강 관세 폭탄’을 무기로 무역 시장에서 폭주하고 있는 미국을 진정시키기 위해 ‘자동차 분야 양보’라는 카드를 꺼 내들었다.

철강 업계는 ‘급한 불’을 끄며 잠시 숨을 돌릴 수 있게 됐지만 글로벌 시장 경쟁 심화와 ‘한국지엠 사태’ 등으로 힘든 시기를 겪고 있는 자동차 산업에는 타격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한국 자동차 산업이 미국발 ‘무역 전쟁’의 희생양으로 전락한 그림이다.

26일 산업통상자원부가 발표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개정협상 결과에 따르면 한국과 미국은 자동차에서 화물자동차(픽업트럭) 관세철폐 기간 연장, 자동차 안전·환경 기준 유연성 확대 등에 합의했다.

앞서 미국은 올 2021년까지 픽업트럭에 대한 25% 관세를 완전히 없애기로 했지만, 이번 합의에 따라 철폐 기간이 2041년까지로 20년 연장됐다. 또 미국 자동차 안전기준을 준수한 경우 한국 안전기준을 맞추지 못하더라도 수입을 허용하는 물량 기준을 제작사별 연간 2만 5000대에서 그 두 배인 5만대로 늘렸다.

정부는 현행 연비·온실가스 기준을 올 2020년까지 유지하기로 했다. 다만 차기 기준(2021~2025년)을 설정할 때 미국 기준 등 글로벌 추세를 고려하고 판매량이 연간 4500대 이하 업체에 완화된 기준을 적용하기로 했다.

표면적으로는 상당히 ‘선방한’ 협상 내용이라는 게 업계의 관측이다. 가장 피해가 클 것으로 예상됐던 ‘미국 자동차 부품 의무사용’이 합의에서 빠졌기 때문이다. 미국은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재협상에서 자국산 부품 사용 비중을 50%로 올리는 내용 등을 요구했었다.

한미 FTA에서 이를 요구·수용할 경우 우리 완성차 업체와 부품 업계의 심각한 경쟁력 하락이 우려됐었다.

우리 측이 양보한 미국산 차에 대한 배려와 픽업트럭 관세 연장 등도 ‘당장의 충격’은 거의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현재 미국에 판매되는 국산 픽업트럭 모델이 없는데다 미국 브랜드 차량의 국내 시장 점유율이 크게 낮은 탓이다.

문제는 자동차 산업의 미래 신성장 동력의 선택지가 그만큼 줄게 됐다는 점이다.

실제 현대차그룹의 경우 수년간 최초의 픽업트럭 양산을 위해 연구·개발을 진행 중이었다. 중국과 함께 세계 최대 시장 중 하나인 미국에서 픽업트럭에 대한 인기가 상당하기 때문이다. 현대차는 앞서 픽업트럭인 ‘싼타크루즈’의 콘셉트카를 공개하고 양산 일정을 조율 중이었다.

쌍용차 역시 인도 마힌드라그룹과 미국 현지 진출 등을 고려하고 있었지만, 이번 협상을 통해 렉스턴 스포츠 등의 수출길이 사실상 막히게 됐다는 분석이다.

미국 기준만 충족하면 수입할 수 있는 쿼터가 늘어난 것도 ‘미래의 위협’으로 꼽힌다. 현재 제너럴모터스(GM), 포드, 크라이슬러 등 미국 ‘빅3’ 업체들은 국내 수입차 시장에서 큰 존재감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차량 품질이 국내 소비자들의 눈높이에 미치지 못하는데다 브랜드 이미지도 높지 않다는 이유에서다.

다만 안전기준이 완화될 경우 인증에 큰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다양한 차종을 국내 시장에 선보일 가능성이 커진다. ‘묻지마 신차 투입’을 통해 시장을 혼탁하게 만들 여지가 있다는 뜻이다.

‘관세 폭탄’의 위기를 벗어난 철강 업계의 표정은 상대적으로 밝은 상태다. 한국철강협회는 26일 보도자료를 통해 "안보를 이유로 철강 수입을 일방적으로 규제하려 했던 미국의 무역확장법 232조 조치에서 한국이 제외된 것은 다행한 일"이라며 "철강 업계는 그동안 한국의 국가면제를 위해 정부가 기울여 온 전방위적인 노력에 심심한 사의를 표한다"고 밝혔다.

협회는 "우리나라의 국가면제 조건은 2015~2017년 평균수입물량의 70%로 한국산 수입을 제한한다는 것으로, 이는 작년도 대미 철강수출의 74% 수준"이라며 "이 같은 협상 결과는 미국이 당초 작년 철강수입의 63% 수준으로 제한하려 했던 것보다 양호한 결과이나, 미국의 초강경 입장으로 더 많은 쿼터를 확보하려 했던 정부의 노력이 온전히 성사되지 못한 것은 아쉬운 부분"이라고 평가했다.

다만 "한국의 국가면제라는 결과는 미국이 한국을 주요 동맹국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조치의 일환이며, 추후 협상에서도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한 것으로 생각된다"고 덧붙였다.

김필수 대림대학교 자동차학과 교수는 "미국산 부품 사용 비중 증가 등 (한미 FTA 재협상 과정에서) 우리 측에 크게 불리한 조건을 피했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선방했다고 본다"면서도 "지금 시점에서는 철강 분야와 자동차 산업에 미치는 손해가 크지 않지만, 중·장기적으로 우리가 쓸 수 있는 카드를 버렸다는 점은 분명 아쉬운 부분"이라고 진단했다.

한편 한국무역협회는 이날 논평을 통해 "한미 FTA 개정협상의 원칙적 합의도출을 크게 환영한다"며 "개정협상의 신속한 타결로 불확실성이 조기에 제거됨에 따라 우리기업들은 이제 대미 무역·투자 전략을 보다 안정적이고 장기적으로 마련할 수 있게 됐다"고 밝혔다.

이어 "이번 개정협상을 계기로 정부와 민간업계는 미국과의 경제협력과 네트워크를 강화해 나감으로써 양국간 불필요한 오해와 불만을 불식시키고 상호 이해를 증진시켜 나가는데 힘써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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