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23일 교통사고로 중국인 관광객들이 입원해있는 병원을 찾아 부상자들을 직접 위로했다고 24일 보도했다. (사진=연합) |
[에너지경제신문 한상희 기자] 북중관계가 급속히 개선되는 시점에 북한에서 중국인 관광객들의 대형 인명사고가 발생하자,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직접 나서는 등 북한 당국이 사고 대응에 총력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 주목된다.
이를 두고 지난달 김정은 위원장의 전격적인 베이징(北京) 방문으로 북중 정상회담이 이뤄지는 등 최근 급속히 가까워지는 북중 관계를 반영한다는 해석이 나온다.
남북 및 북미 정상회동을 앞두고 중국이라는 든든한 방패막이가 필요한 북한과 한반도 비핵화 논의에서 중국이 빠지는 ‘차이나 패싱’을 우려한 중국의 셈법이 맞아 떨어지면서 서로 더욱 가까이 다가서는 형국이다.
조선중앙통신과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김 위원장이 지난 23일 오전 6시 30분 북한 주재 중국 대사관을 방문해 사고와 관련한 위로의 뜻을 표하고 "후속 조치들을 최대의 성의를 다하여 취할 것"이라고 밝혔다고 24일 보도했다. 김 위원장은 같은 날 저녁 부상자들이 입원한 병원도 찾았다.
황해북도에서 지난 22일 저녁 중국인 단체 관광객 등이 탄 버스가 전복돼 중국인 32명과 북한 주민 4명이 사망하고 중국인 2명이 중상을 입었고, 김 위원장이 이를 위문한 것이다.
북한 매체들은 이번 일을 ‘뜻하지 않은 교통사고’, ‘중국 관광객들 속에서 많은 인명피해가 발생한 것’ 등으로 표현하며 구체적인 피해 규모를 밝히지 않았지만, 국내에서 발생한 대형 사고를 공개한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북한 매체가 김 위원장의 동선을 분 단위까지 거론한 것도 매우 이례적이다.
김 위원장이 사고 직후 신속하게 중국 대사관을 방문하는 등 최고지도자 차원에서부터 대응에 성의를 보인다는 점을 부각하기 위한 표현으로 보인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평양에 있는 중국대사관을 찾아 교통사고로 중국인 관광객들이 인명 피해를 본 데 대해 위로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24일 보도했다. (사진=연합) |
노동신문은 이날 1면에 김 위원장이 침통한 얼굴로 리진쥔(李進軍) 주북 중국대사를 만나고 병원을 찾아 부상자들을 위문하는 사진 4장을 게재하기도 했다.
김 위원장이 집권 후 주북한 중국 대사관을 방문한 것 또한 처음이다.
아버지인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생전 여러 차례 중국 대사관을 찾았지만, 김정은 위원장의 경우 장성택 처형과 북한의 핵·미사일 실험 등으로 북중관계가 경색되면서 대사관을 방문하지 않았다.
북한이 이처럼 이번 사고에 민감한 대응을 보이는 것은, 김정은 위원장의 지난달 중국 방문으로 다시금 상승 흐름을 타기 시작한 북중관계에 ‘돌발악재’가 될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김 위원장은 지난달 25∼28일 집권 이후 처음으로 중국을 방문해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과 회담하고 양국간 교류와 협력을 확대하자는 데 합의했다.
그는 중국 예술단을 이끌고 방북한 쑹타오(宋濤) 중국 공산당 대외연락부장을 지난 17일 만나서도 ‘여러 분야에서의 교류와 왕래’를 활발히 하는 데 대해 의견을 나누는 등 북중 간 인적 교류에 대한 의지를 표출해 왔다.
이런 상황에서 사고 수습이나 사후조치에 잡음이 생길 경우 중국인들 사이에서 대북 정서가 다시 악화할 수 있다는 점을 북한 당국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북한이 염두에 두고 있을 중국인 관광 활성화에도 위축 효과가 있을 수 있다.
김 위원장은 이런 점을 의식한 듯 리진쥔 대사에게 "우리 인민들도 비극적인 이번 사고를 자기들이 당한 불행으로 여기고 있다"고 양국 국민의 유대를 강조하기도 했다.
베이징 소식통은 "북한 최고 지도자가 외국인 교통사고 때문에 현지 외국 공관을 직접 찾는 것은 보기 힘든 일"이라면서 "이는 최근 북한이 얼마나 중국에도 공을 들이고 있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밝혔다.
시진핑 주석도 23일 직접 나서 북한과 협조해 이번 교통사고 수습에 전력을 다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리커창(李克强) 중국 총리는 사고 경위 조사 및 치료 구호와 사고 수습에 최선을 다하라고 관계 부서에 당부했다.
루캉(陸慷)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정례 브리핑에서 "북한 측도 이 사고를 매우 중시하고 있다"면서 "북한의 유관 부서들도 중국과 함께 구호 및 치료 활동, 사고 처리 및 조사를 벌이고 있다"고 밝혔다.
리진쥔(李進軍) 주북 중국대사도 "김 위원장이 대사관과 병원을 찾아준 데 감사하며 북한 당과 국가 지도자 및 유관 부서 책임자가 사고 현장과 병원에서 구호 및 사고처리를 지휘하는 것은 북한이 이를 고도로 중시하고 있음을 보여준다"면서 "중국은 북측과 긴밀한 소통과 조율을 통해 사후 처리에 전력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중국이 자국민 교통사고와 관련해 북한 최고 지도부와의 긴밀히 공조 속에 수습에 나선 것은 이례적으로 지난달 북중 정상회담 후 급진전된 관계를 이어가려는 양측의 의지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중국 지도부는 지난해에도 한국 학생들이 사망한 사고에 대해서도 유사한 조치를 취했다.
문재인 대통령 당선일인 지난해 5월 9일 중국 산둥(山東) 성 웨이하이(威海) 시의 한 터널에서 유치원 차량에서 불이 나 한국 학생 등 12명이 숨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에 시진핑 주석은 이번 사고에 대해 애도를 표하고 유족에게 위로를 전했으며 문 대통령은 중국의 위로와 적절한 사고 처리 및 후속 조치에 감사를 표하면서 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THAAD·사드) 문제로 갈등을 빚던 한중 관계가 개선되는 전환점을 제공한 바 있다.
한 소식통은 "남북 및 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그 무엇보다 북중 관계가 중요한 시점에 이번 사고는 서로 가까워지는 계기를 제공할 수 있다"면서 "특히 북미 정상회담 후 시진핑 주석이 방북할 것으로 예상해 양국 간 소통을 더욱 강화될 것"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