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원 칼럼] 베이비부머를 키운 어린이잡지

에너지경제신문 입력 2018.08.21 18:50

김세원 가톨릭대학교 언론홍보대학원 초빙교수



얼마 전 강릉을 다녀오면서 페이스북에 나를 키운 건 8할이 경포 앞바다, 나머지는 소년중앙 같은 어린이잡지라고 썼더니 반응이 뜨거웠다. 댓글의 대부분은 어린 시절 즐겨보았던 어린이잡지와 만화에 대한 추억이었다.

초등학교를 다니던 70년대는 어린이잡지 전성시대였다. 어문각에서 발행하는 새소년, 중앙일보의 소년중앙, 육영수여사가 세운 육영재단에서 발행하는 어깨동무가 트로이카였고 기독교계에서 발행하는 ‘새벗’과 천주교계에서 펴내는 ‘가톨릭소년(소년)’, 경향신문사의 소년경향 등이 있었다. 스마트폰은 커녕 인터넷도 PC도 없던 시절, 볼 거리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켜준 것은 어린이 신문과 잡지들이었다.

흑백TV가 보급되기 시작했지만 어린이 시간은 오후5시부터 한 시간 남짓에 불과해 늘 아쉬웠다. 가정환경조사서에 냉장고 텔레비전 밥솥 같은 가전제품이 개명의 정도와 부유함을 측정하는 주요 지표였을 정도로 TV는 귀한 물건이기도 했다. 동네사람들이 텔레비전 있는 집에 모여 아폴로 11호의 달착륙 장면을 지켜봤던 기억이 지금도 또렷하다.

그런데 왜 세계명작전집이나 위인전이 아니라 어린이잡지였을까. 어린이잡지는 본지 연재만화 말고도 별책부록과 특별부록을 통해 다양한 만화들을 선보였다. 특히 소년중앙은 ‘우주소년 아톰’, ‘황금박쥐’나 ‘요괴인간’은 물론 ‘왕거미(스파이더맨)’, ‘타이거마스크’, ‘밀림의 왕자 레오’ 등 TBC를 통해 방영되던 애니메이션의 원작만화를 별책부록으로 제공해 인기가 높았다. 어린이잡지는 어린이 눈높이에 맞춘 지식백과이기도 했다.

신화, 역사, 고고학, 첨단기술, 스포츠과학, 세계의 미스터리, 인체와 우주의 신비, UFO 등 온갖 읽을거리로 가득했다. 그것도 사진과 그림, 도표와 함께 소개돼 머리속에 쏙쏙 들어왔다. 오죽하면 ‘피라미드의 신비’와 ‘파라오의 저주’, 혹은 ‘나스카평원의 수수께끼’, ‘마야의 인신공양’ 같은 단골 특집들로 인해 미국이나 일본보다도 이집트와 페루, 칠레 같은 나라가 더 친숙하게 느껴졌을까.

수많은 어린이잡지의 콘텐츠 중에서 필자를 사로잡은 것은 ‘소년두꺼비’에 연재됐던 ‘무적의 009’란 만화였다. 009로 변신해 하늘을 나는 꿈을 수없이 꾸었고 장래 희망란에 ‘초능력자’나 ‘사이보그’라고 쓸 것인가를 한참 고민하다가 초능력을 가진 사이보그를 제작하는 ‘과학자’라고 고쳐 써서 제출할 정도였다.

냉전이 한창이던 1960년대, 세계 도처에서 수상한 실종 사건이 이어지고 세계 정복을 꿈꾸는 블랙고스트단은 평범한 사람들을 납치한 후, 몸의 일부를 개조하여 신체능력을 극대화한 사이보그로 만들고 이들로 구성된 전투부대를 창설한다. 하지만 이 프로젝트의 책임자인 길모어박사는 자신이 개조한 9명의 사이보그와 함께 탈출하여 블랙고스트와 대결을 벌인다.

아기모습이지만 천재적 전자 두뇌를 가진 001은 고속연산 처리능력과 텔레파시, 텔레포트 능력을 가진 소련출신의 사이보그, 뉴욕출신의 002는 다리에 제트 분사장치가 탑재돼 고속 이동이 가능하다. 시력과 청력이 뛰어난 프랑스여자 003, 100만 마력의 힘을 가진 인디언출신의 005, 불을 뿜는 중국요리사 출신의 006, 이들을 지휘하는 009는 전직 카레이서 출신으로 몸에 가속장치가 있다. 인종은 물론, 출신국가도 다른 9명의 사이보그들은 각기 다른 초능력을 발휘하여 세계 평화와 정의를 위해 싸운다.

핵전쟁으로부터 인류를 구하기 위해 009가 핵폭탄을 실은 로켓을 타고 태양을 향해 날아가는 마지막 장면에선 그의 희생정신에 감동받아 눈물깨나 흘렸던 것 같다. 각자 롤모델은 다르겠지만 그 시절 만화들은 동료애와 희생정신, 조국에 대한 충성심을 넘어선 인류애와 정의수호의 사명감을 어린이들에게 가슴속 깊이 각인시켜 주었다.

어린이잡지가 베이비부머들에게 심어준 끝모르는 호기심과 각종 잡학지식, ‘선공후사(先公後私)’의 정신이 대한민국을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으로 끌어올린 원동력은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그렇다면 국가보다 개인이 우선이고 ‘워라벨’과 ‘소확행’을 추구하는 밀레니얼세대를 키우는 것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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