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때 유행하던 말이 있다. ‘술은 마셨지만 음주운전은 하지 않았다.’
한국에서 처음 열린 보아오포럼을 보며 문득 수년 전 음주운전 사건으로 구설에 올랐던 A가수가 변명으로 내놨던 말이 오버랩됐다.
20일 최태원 SK그룹 회장, 정의선 현대차그룹 수석부회장 등 국내 재벌기업 오너들은 보아오포럼이 열린 중구 장충동 신라호텔을 찾았다. 그러나 보아오포럼엔 방문하지 않았다는 게 이들의 공식입장이다. 공교롭게 장소가 같았을 뿐, 방문의 목적은 따로 있다는 것이다. 철저한 선긋기로 비춰졌지만 사실만 놓고 따져보자면 실제 이들은 행사장 입구를 지나치긴 했지만 내부로 들어가진 않았다.
다만 이게 진짜 행사를 참여한 것인지 아닌지 여전히 석연찮긴 하다. 포럼의 다양한 목적 중 하나가 다양한 해외 인적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그 안에서 다양한 사업기회를 모색해 나가기 위함인데 이 부분에 있어서 최 회장과 정 수석부회장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기 때문이다.
이들이 신라호텔을 찾은 이유는 명확하다. 행사 호스트인 반기문 보아오포럼 이사장과 포럼을 위해 방한한 왕융 중국 국무위원을 접견하기 위함이었고, 그들과의 만남 또한 성사됐다. 그러나 여전히 포럼엔 참석하지 않았다는 게 일관된 입장이다.
최 회장은 막판까지 보아오포럼 서울회의 주제발표 여부를 놓고 고심하다가 이를 최광철 SK사회공헌위원회 위원장에게 넘겼다. 현장에서 배포된 행사 안내책자 속 발표자 명단에 ‘최태원’ 이름 석자가 그대로 박혀 있을 정도였다. 정 부회장 역시 당일 아침까지만 해도 포럼 개막식에 참석할 예정이었다가 공식 불참으로 부랴부랴 변경했다. 그리곤 결과적으로 두 인사 모두 행사 당일 모습을 드러냈다. 아이러니할 수밖에.
‘아시아판 다보스포럼’이라 불리는 보아오포럼 지역회의가 한국에서 처음 열렸다. 역대 지역회의 가운데 가장 많은 인원인 800명 가량이 찾았다고 한다. 그런데 정작 한국 재계를 대표해 자리를 빛내야 할 재계 총수들의 모습은 ‘현장’에 없었다. ‘물밑회동’이란 그럴싸한 포장으로 가리긴 했지만 모양새가 영 빠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재계에서는 이런 배경을 보아오포럼 서울회의 개최 주관을 지난 정권에서 적폐의 온상으로 지목된 전국경제인연합회에서 맡은 것에서 찾고 있다.
보아오포럼 서울회의의 실패는 주관사인 전경련의 탓일까, 아니면 전경련을 통해 기금을 조달했고 또 여전히 악몽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는 재계의 탓일까. 그 와중에 정부는 정권이 바뀌어도 여전히 재계에 특정 기금 조성을 독려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