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병무 금융증권 에디터
▲민병무 금융증권 에디터 |
[에너지경제신문=민병무 기자] 모두들 어렵고 힘든 시절이었다. 돈 나올 구멍이 없어 ‘일수(日收)’를 썼다. 현찰을 빌린 뒤 본전에 이자를 합해 날마다 일정한 금액을 갚았다. 땅거미가 지면 아줌마는 두툼한 가방을 들고 어김없이 집으로 찾아왔다. 온종일 날품을 팔거나 행상을 하고 돌아온 어머니는 그날 저녁 먹을 쌀 한 되와 밤새 온기를 지켜줄 연탄 2장 살 돈을 남겨두고 나머지를 모두 건넸다. 그러면 빈칸 30여개가 그려진 수첩에 도장을 쿡 찍어 주었다. ‘안떼먹고 무사히 갚았음’을 인증하는 참 잘했어요 도장인 셈이다. 1972년 겨울날의 흔한 모습이다.
방식만 달라졌을 뿐, 1인당 국민소득 3만달러 시대인 2019년 겨울에도 풍경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건장한 체격의 오토바이맨이 상가와 유흥가를 돌며 ‘급전(急錢)’ 명함을 휙휙 날린다. 얼마나 많이 뿌려봤는지 백발백중이다. 셔터문·유리문 사이로 날아가 정확히 꽂힌다. 반나절만에 ‘신용불량자도 가능한 여성안심대출’ ‘10분 번개대출’ ‘자영업자 무보증·무담보 대출’ 등이 수북이 쌓인다. 금융권 대출이 곤란한 서민을 겨냥한 무등록 불법 대부 영업이 대낮에도 판을 친다. 고정적 수입이 없는 대학생이나 채무 상환능력이 취약한 영세자영업자는 전화를 걸까 말까 망설인다. 당장 돈을 융통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엄청난 살인이자는 문제 되지 않는다. 이게 유일한 동아줄이다.
지난 21일 박재식 전 한국증권금융 사장이 저축은행중앙회 새 회장으로 선출됐다. 79개 회원사 중 76개사가 모인 총회에서 2차 투표 끝에 이겼다. 저축은행 업계는 3년 임기를 시작한 박 회장에게 큰 기대를 건다. 그는 26회 행정고시에 합격한 후 기획재정부 국고국장과 금융위원회 금융정보분석원(FIU) 원장을 거쳐 증권금융 대표이사를 지냈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관료시절 저축은행 업무를 담당해 업계에 대한 이해가 깊고 네트워크도 풍부해 각종 현안을 잘 해결해 나갈 것이다"라고 말했다. 화려한 경력의 소유자이니 위쪽에까지 입김이 닿을 것이고, 해결사 역할 또한 잘 할 것이란 분석이다.
박 신임 회장도 당선 직후 자신에게 표를 준 업계의 입맛에 딱 들어맞는 멘트를 날렸다. "저축은행 규제 완화를 위해 노력하겠다. 특히 저금리 체제에서 저축은행 업계에 부담이 되는 예금보험료 인하에 힘쓰겠다." 자신이 완수해야 할 임무를 이렇게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예금보험료는 예금자 보호를 위해 금융회사가 예금보험공사에 내는 돈이다. 저축은행의 보험료율은 8년전에 책정된 0.40%다. 은행(0.08%)이나 보험·증권(0.15%) 등 다른 업권에 비해 부담이 크다. 취임 일성으로 이 보험료를 내리겠다고 강조했다.
박 신임 회장은 연봉 5억원쯤을 받는다. 서울 마포 한복판에 번듯한 사무실도 있다. 회원사들이 밀어줬으니 회원사 입장을 적극 반영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적어도 국민 눈치는 살펴야 했다. 대부분은 ‘2011년 저축은행 사태’를 또렷하게 기억한다. 이 당시 부실 덩어리를 살려보겠다고 예금보험료 저축은행계정에서 4조5276억원,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긴급하게 만든 특별계정에서 27조1711억원 등 모두 31조6987억을 쏟아 부었다. 특히 특별계정의 경우 시중은행, 생보사, 손보사 등이 지금도 예금보험료의 45%(저축은행은 100%)를 붓고 있다. ‘쌩돈’을 내고 있는 것이다. 회수율은 형편없다. 2016년말 기준으로 저축은행계정과 특별계정의 회수금액은 1조6140억원과 10조2453억원으로 회수비율은 35.65%와 37.71%에 불과하다.
염치가 있다면 지원금이라도 다 갚은 뒤에 예금보험료를 낮춰 달라고 이야기 하는 게 기본 예의다. 사고 친 입장에서 너무 떵떵거리며 떠드는 모습이 불편하다. 박 회장의 존재 이유는 분명 회원사 이익을 보호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수입원이 결국 금융소비자 주머니에서 나온다는 것을 깊이 새기지 못해 아쉽다. 저축은행 하면 ‘일수 아줌마’와 ‘오토바이 급전명함맨’이 오버랩 되지 않도록 하는 게 더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