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경제

민병무 금융증권 에디터


강북삼성병원과 경희궁 사이에 ‘돈의문박물관마을’이 문을 열었다. 서울 한복판답지 않게 낡은 건물 30여 동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올드 빌리지다. 확 밀어 버리고 빌딩을 올릴 수도 있었지만, 최대한 원형을 그대로 유지해 최근 리뉴얼을 마쳤다. 요즘 유행하는 뉴트로(new-tro) 감성이 충만한 살아있는 뮤지엄 동네로 재탄생 했다. 정체성을 되살릴 수 있도록 1년 내내 다양한 전시, 공연, 마켓, 체험교육이 열린다. 이달부터 ‘근현대 100년의 역사·문화가 살아 숨쉬는 기억의 보관소’라는 콘셉트로 본격 운영에 들어갔다. 주로 1950∼1980년대의 향수를 자극하는 볼거리가 넘친다.

이곳에서 아주 작은 사진 한장을 발견했다. 관심이 없었다면 그냥 모르고 지나쳤을 것이다. 1948년 대학을 졸업한 김주호(1926∼2015) 씨가 조선식산은행(朝鮮殖産銀行)에 취업하면서 받은 임명장이다. 조선식산은행은 현재의 KDB산업은행이다. ‘김주호. 행원을 명함. 월봉 금 삼천구백사십원을 급함. 서력 일구사팔년 팔월일일. 주식회사조선식산은행’이라고 쓰여 있다. 주요내용은 한문으로 작성했고 토씨만 한글로 적었다. 셈이 밝아야 하는 은행의 특성 때문인지, 아니면 당시 모든 회사의 관행이었는지 아예 월급 액수까지 표기한 것이 이채롭다. 연봉계약서도 겸하고 있는 셈이다.

조선식산은행 임명장

김주호 씨는 첫 월급으로 3940원을 받았다. 연봉으로 환산하면 4만7280원이다. 그 돈으로 무엇을 얼마만큼 살 수 있었을까. 임명장 옆에 당시 장바구니 물가 수준이 친절하게 설명되어 있다. 새 구두 한 켤레를 신으려면 3460원이 들었다. 거의 한달치 벌이를 털어 넣어야 할 만큼 가죽 신발 값이 비쌌다. 취직 기념으로 한턱 내기도 했으리라. 소고기 한 근(600g) 300원, 소주 한 되(1.8L) 420원을 써야 했다. 20kg짜리 쌀 한 포대는 1840원이었다. 지난해 산업은행 신입 초임 연봉은 4938만원이다. 월급으로 따지면 411만원쯤 된다. 공공기관 경영정보 공개시스템 알리오에 공시된 자료를 분석한 결과다.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쭉 걷다 보면 끄트머리에 구세군 제일교회가 나온다. 그 앞 옛 덕수궁 선원전(조선 역대 왕들의 어진과 신주를 모신 장소)과 미국 대사관 관저 사이로 120m 길이의 좁은 길이 새로 났다. ‘고종의 길’이다. 옛 러시아 공사관이 있는 정동공원까지 이어진다.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들에게 시해된 을미사변 후 고종은 신변에 위협을 느낀다. 1896년 2월 11일 새벽에 왕은 가마를 타고 경복궁을 빠져 나와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 아관파천(俄館播遷 ) 때 왕이 이용했을 것으로 추측되는 탈출루트를 복원한 것이다.

조선저축은행 중역사택

조선저축은행 중역사택 정원

여기에도 눈길을 사로잡는 사진이 있다. 선원전 영역 발굴조사를 위해 설치한 가림막에 1938년 촬영한 조선저축은행(朝鮮貯蓄銀行) 중역 사택 모습이 프린트 되어 있다. 조선저축은행은 지금의 SC제일은행이다. 펜스 너머에 지하 1층·지상 2층의 중역 사택이 아직 남아 있지만 직접 볼 수는 없다. 일제 강점기에 만들어진 뒤 광복 후에는 미국대사관 숙소로 쓰였다. 사택의 정면 모습, 정원 전경, 응접실, 2층 식당 등을 찍은 6장이 벽을 장식하고 있다. 지금 봐도 가구와 조명 등 인테리어가 럭셔리하다. 사람이 등장하지는 않지만 ‘돈을 만지는 뱅커’의 흔적이 곳곳에 숨어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은행의 또 다른 모습이 오버랩된다.

금융기관에 가면 ‘희망을 키우는 평생은행’ ‘고객이 편리한 1등 은행’ ‘늘 곁에, 더 가까이 있는 은행’ 등 홍보물이 잔뜩 붙어 있다. 수익률을 굵게 강조한 상품 소개 전단지도 부착돼 있다. 온라인과 모바일 거래가 대세지만 여전히 발품 팔아 은행을 찾는 고객이 많다. 그 곳에 추억이 방울방울 솟아나는 은행 사진이 있다면 어떨까. 그 사진 속에 우리 이웃이 주인공으로 나오면 더 기쁘리라. "아 그땐 그랬었지"하며 고객에게 스토리텔링을 만들어 주는 귀한 선물이 될 것이다. 참 따뜻한 은행, 생각만 해도 기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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