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경제신문=정희순 기자] 게임중독을 마약이나 알코올 처럼 질병으로 분류해 치료 대상으로 규정해야 한다는 안건이 세계보건기구(WHO)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되면서 그 파장이 게임산업계 전반으로 확산되고 있다. 국내외 게임산업계는 게임을 질병으로 규정할 각종 규제가 강화돼 게임산업 기반이 붕괴될 것이라고 우려하며 대응책 마련에 분주하다. 국내외 게임산업계는 WHO에 대해 질병 규정 자체를 재고할 것을 요구하는 한편 공동대응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연 14조 원 규모의 시장을 형성하며 글로벌 게임산업을 이끄는 국내 산업을 놓고 정부부처 간에도 이견을 보이며 갈등이 본격화하는 모양새다.
◇ 보건복지부 vs. 문화체육관광부 ‘이견’
27일 업계에 따르면 WHO는 28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리는 제 72차 총회 폐막식에서 게임중독을 게임사용장애(Gaming disorder)로 분류한 제11차 국제질병표준분류기준(ICD)안을 최종 발표한다.WHO에 따르면, △게임에 대한 통제 기능 손상 △일상생활보다 게임 우선 △부정적 결과가 발생함에도 게임을 중단하지 못하는 등의 현상 등이 12개월 이상 지속될 경우 게임중독으로 진단할 수 있게 했다. 증상이 심각할 경우에는 이보다 적은 기간에도 게임중독 판정을 내릴 수 있다.
WHO는 오는 2022년부터 각 회원국에 게임중독을 질병으로 치료하도록 권고할 예정이다. 이렇게 되면 각 회원국은 코드가 부여된 질병에 대해 보건 통계를 발표해야 하고, 치료와 예방을 위한 예산을 배정할 수도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WHO의 이 같은 방침을 놓고 부처간 이견을 보이고 있다. 보건복지부는 후속 절차를 준비하기 위해 6월 중 관계부처와 전문가, 관련 단체 등이 참여하는 협의체를 구성할 예정이다. 이에 비해 문화체육관광부는 국내 콘텐츠 산업의 위축을 우려해 적극적으로 반대 입장을 표하고 있다. 박양우 문체부 장관은 지난 9일 국내 게임업계 관계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충분한 사회적 논의 없이 (질병 코드 도입이) 성급하게 결정된다면 게임산업의 위축과 게임을 즐기는 이용자들에게도 큰 피해가 예상된다"며 직접 반대의 뜻을 밝히기도 했다.
◇ 콘텐츠산업 선두 주자 게임업계…공대위 구성하고 적극 대응 중
국내 게임업계는 이 같은 방침에 적극적으로 반대 입장을 밝히고 있다. ‘게임중독’이 질병으로 공식 등재되면 이것이 게임 규제에 대한 좋은 ‘명분’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먼저 국내 게임학회·협회·기관 등 88곳은 게임질병코드 도입 반대를 위한 공동대책 준비위원회를 꾸렸다. 이들은 WHO 총회에서 안건 통과가 이루어진 지난 25일 "WHO의 게임장애 질병코드 지정에 대해 강력히 규탄한다"며 "국내 도입을 반대한다"는 내용의 성명서를 내기도 했다. 한국게임산업협회는 28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에서 ‘WHO의 게임이용장애 질병코드 도입에 따른 긴급토론회’를 열어 게임이용장애 질병 코드 도입에 대한 각계 의견을 모으기로 했다. 사단법인 한국인터넷기업협회도 내달 3일 해결방안 모색을 위한 행사를 개최할 예정이다.
국내 게임사들은 "WHO 질병코드 등재와 관련해서는 협회를 통해 공동으로 대응하고 있다"며 직접적인 언급을 하고 있지 않지만,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는 못하는 분위기다. 엔씨소프트, 넥슨, 넷마블, 펄어비스, 네오위즈 등 국내 주요 게임기업들은 자사의 SNS 공식 계정을 통해 ‘#게임은_문화입니다 #질병이_아닙니다’라는 해시태그를 달고 ‘게임은 우리의 친구이며 건전한 놀이문화입니다. 게임이용장애 질병코드 등재에 반대합니다’라는 메시지를 표출하고 있다.
국내 한 게임기업 관계자는 "WHO의 ‘게임중독’ 질병 코드 등재는 게임산업 규제의 명분으로 작용할 수 있다"라며 "특히 술이나 담배에 붙는 세금처럼 ‘게임세’가 붙진 않을지 우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 다른 기업 관계자는 "국내 게임산업에 대한 규제가 심해질수록 해외 기업 입장에서는 국내 기업과 손을 잡고 사업을 벌이는 일을 꺼릴 수밖에 없다"라며 "국내 게임 콘텐츠 시장이 크나큰 타격을 받게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고 설명했다. 이어 "대한민국의 콘텐츠 산업 발전을 위해서라도 WHO의 이 같은 결정은 철회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한편 글로벌 게임업계도 WHO 방침에 반발하며 공동 전선을 구축한 상태다. 유럽, 영국, 미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한국, 남아공, 브라질 등 전 세계 게임산업협회·단체 9곳은 27일 공동 성명을 통해 세계보건기구(WHO) 회원국에 "국제질병분류 11차 개정안에 ‘게임이용장애’를 포함하는 결정을 재고해달라"고 요구했다. 이들은 "전 세계 게임산업 협회, 단체들은 WHO가 학계의 동의 없이 결론에 도달한 것에 우려하고 있다"며 "이번 조치는 막대한 영향력을 가진 결과, 의도치 않은 결과를 부를 수 있고 실질적으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위해를 가져올 수 있다"고 우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