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였다면 대일문제 이렇게 악화시키지 않고 결단 내렸을 것" 일갈
▲박지원 의원이 최근 일본 수출규제에 대한 문재인 정부의 대응을 지적하고 나서 관심을 모으고 있다. 사진은 지난 6월 27일 오후 열린 국회 사법개혁특별위원회 전체회의에서 민주평화당 소속 박지원 의원이 의사진행 발언을 하고 있는 모습. (사진=연합) |
[에너지경제신문=성기노 기자] 일본의 수출규제 정국을 대하는 정치권의 기류가 확연하게 두 갈래로 엇갈리고 있다. 현 집권세력의 분위기는 과거 항일운동을 떠올리며 강경론에 힘을 싣는 모습이지만 야권에서는 한일간의 미래 재정립을 전제로 한 수습론을 강조하고 있다. 지금의 상황은 지금으로부터 정확하게 383년 전인 인조 14년 병자호란 때의 주전파와 주화파의 격돌과 흡사하다는 의견도 있다. 외침에 대한 약소국의 혼란과 비애를 우리의 역사는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인조 14년(1636년) 청나라 태종은 국호를 청이라고 고치고 스스로를 황제로 칭하며 우리나라에 형제관계에서 군신관계로 바꿀 것으로 요구해왔다. 이에 대해 조정은 일전불사를 주장하는 주전파와 전술 차원의 화목을 강조하는 주화파로 갈라져 큰 논쟁이 벌어졌다. 당시는 강경파인 척화 주전론이 득세했다. 하지만 전투 결과 열흘만에 청나라 군대가 한양을 점령해버렸다. 수많은 인명과 재산 피해가 났고, 온갖 치욕을 견뎌야 했다. 인조대왕은 남한산성에서 내려와 삼전도에서 무릎을 꿇고 항복, 신하의 예를 바쳐야 했다.
그나마 주화파 최명길 등이 애쓴 덕분으로 두 왕자를 볼모로 보내는 선에서 왕조가 문을 닫는 최악의 사태는 면할 수 있었다. 주전파였던 김상헌과 삼학사(三學士:윤집, 오달제, 홍익한) 등이 청에 잡혀가 옥사하였다. 후세 사가들은 이를 두고 "애국의 길과 방법이 다를 뿐 척화파도 주화파도 모두 애국자였다"라고 균형감 있게 보는 사람도 있다. 남한산성이라는 영화가 만들어진 뒤인 2017년 당시 이시종 충북지사는 ‘최명길에 대해 재조명해보자는 제안도 했었다. 청에 끝까지 맞서다 장렬한 최후를 마친 척화파에 비해 살아남은 주화파가 역적으로 몰리는 것에 대한 재조명의 일환이었다. 굴욕을 참으며 후일을 기약했던 주화파의 현실적 판단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일간의 무력충돌은 발생하고 있지 않지만, 병자호란이 있고 380여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당시와 비슷한 상황을 마주하고 있다. 일본의 수출규제 강도는 점점 더 거세질 것이라는 게 중론이다. 일본은 별다른 변화가 없는 한 다음달부터 한국을 화이트국가 리스트에서 해제한다고 고집하고 있다. 이것이 현실화되면 무려 1,112개에 해당하는 품목이 통째로 수출규제 대상에 오른다. 이런 총칼 없는 전쟁의 한 가운데에 있는 우리 정부의 대응은 일단 강경모드다.
한·일 간 중재를 요청하기 위해 미국에 갔던 김현종 청와대 안보실 차장이 귀국길에 "1910년 국채보상운동과 1997년 외환 위기 때 금 모으기 운동을 던 것처럼 뭉쳐서 이 상황(일본의 보복)을 함께 극복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통상전문가이자 미국통인 그가 급하게 미국을 방문해 이해조정을 요청했지만 미국으로부터 확답을 얻지 못했다. 대신 김 차장은 ’국채보상운동‘이란 110년 전 운동을 꺼냈다. "우리는 국채보상으로 (위기를) 극복한 민족의 우수함이 있다"고 주장했다. 지난주 문재인 대통령은 전남도청에서 "전남 주민들은 이순신 장군과 함께 불과 열두 척 배로 나라를 지켜냈다"고 했다. 한·일 충돌을 염두에 두고 420년 전 ’이순신 장군‘의 힘을 빌리려는 것이다. 조국 민정수석도 동학 농민혁명을 소재로 한 노래 ’죽창가‘를 소셜미디어에 올렸다. 이런 집권세력의 기류는 외교 갈등 해결 대신 대일 항거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듯하다. 반일 감정에 불을 붙이려는 모습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하지만 야권에서는 1965년 한일국교정상화 이후 정체돼 온 한일간의 관계를 새로운 미래를 전제로 재정립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이번 일본 수출규제 사태 해결도 문재인 대통령이 한일관계 재정립을 전제로 아베 총리와 만나 대타협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야권의 주장 가운데 최근 주목을 받는 목소리가 있다. 바로 박지원 의원이다. 그는 김대중 대통령 당선에 따라 청와대 대변인으로 집권세력에 입성한 뒤 청와대 공보수석, 문화부장관, 정책기획수석, 정책특보, 비서실장 등의 요직을 두루 거치며 김대중 대통령의 ’분신‘ 역할을 했다. 누구보다도 김대중 정권의 명과 암을 잘 알고 있다.
그런 박 의원이 최근의 일본 수출규제 정국에 대해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는 15일 "DJ였다면 대일문제(강제징용)를 이렇게 악화시키지 않고 국익을 위해 결단을 것"이라는 말로 문재인 정부의 외교미숙을 질타했다. 그러면서 "문재인 대통령은 야당복은 있지만 참모복은 없다"며 국익에 입각한 냉정하고 올바른 조언을 내리는 참모가 문 대통령 주변에 없는 현실을 개탄했다.
▲박지원 의원은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청와대 대변인으로 들어간 뒤 문화부장관 정책기획수석 그리고 마지막 비서실장 등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사진=박지원 의원 홈페이지)
박 의원은 이날 자신의 페이스북에 ’DJ였다면?‘라는 제목의 글을 올려 최근 일본의 경제보복 등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박 의원은 "DJ는 외교 강화론자이며 늘 국익을 생각하라 하셨다"며 그런 신념에서 DJ는 주변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1965년)한일회담 찬성, 일본 대중문화 개방, 비난을 감수하며 4대국 보장론과 햇볕정책 고수. 대만과 단교하고 중공과 외교관계를 가져야 한다고 주창"한 사실을 나열했다. 그 결과 "(한국 경제발전) 대중문화 개방으로 한류가 시작됐으며 중국과 외교관계 시작으로 튼튼한 안보,한미 동맹, 한미일 공조,중 러의 협력(이 가능했다)"는 점을 소개했다.
또한 박 의원은 "(유승민 의원 등) 일부 보수인사들은 문재인 대통령께 북 중에 하는 절반만 일본에 하라 한다. 그렇게 미일편이었다면 나서서 해결해야 애국보수 아닌가요"라고 꼬집은 뒤 "대통령과 정부에서 백방으로 노력하겠기에 힘을 모아줘야 하는데 싸우려고만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대통령을 위해서라고 지일파 모두가 나서야 하지만 당정청은 몸만 사리고 있다"고 꼬집었다.
특히 박 의원은 "문재인 대통령은 야당복은 있지만 참모복은 없다. 청와대부터 보신처를 찾아 총선에만 나가려고 한다"며 참모들의 처신에도 문제가 있다고 일갈했다. 이어 박 의원은 "DJ였다면? 이런 참모들 날벼락을 쳤다"고 경고했다. 마지막으로 박 의원은 "DJ였다면? 강제징용 문제도 이렇게 악화시키지 않았고, (한일 갈등을) 풀기 위해 국익을 생각하고 용기있는 결단을 내리셨을 것"이라고 문 대통령에게 조언했다.
박 의원은 그동안 문재인 대통령의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에 애정을 가지고 조언을 해왔다. 특히 야당임에도 문 대통령의 남북관계 전략에 대해 지지하는 발언을 많이 해왔다. 그의 주장은 일종의 객관적 무게추 역할을 했고, 뿌리가 같은 민주당의 대야 전략에도 일정정도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도 있다.
한 정치평론가는 "박지원 의원은 김대중 대통령 시절부터 쌓은 정관계의 여러 네트워크로부터 고급정보와 여론을 많이 청취한다. 그는 정국의 주요 이슈가 있을 때마다, 개인적 판단이 아니라 검경의 정보채널과 각계각층의 여론을 청취한 뒤 이를 종합해 자신의 의견을 낸다. 그래서 여야 의원들도 박 의원의 의견을 쉽게 무시하지 못한다. 각종 시사프로그램의 섭외 1순위가 괜히 이뤄진 게 아니다. 이번 박 의원의 일본 수출규제에 대한 대여 충고는 문재인 대통령과 여권의 대일 강경모드에 어느정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문 대통령과 민주당의 정치적 뿌리가 김대중 대통령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라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문 대통령과 여권이 이러한 점을 잘 알고 있지만, 대일 협상과 대타협의 시점을 잘 잡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소설가 박경리(1926~2008년)가 생전 일본에 대해 썼던 글(일본인을 예로 대하지 말라는 요지의 글)을 모은 책 ‘일본산고’(마로니에북스ㆍ2013년)가 출간 6년 만에 재조명되고 있는 등 문 대통령 지지층은 여전히 원칙적인, 강경대응 분위기다. 이런 점 때문에 문 대통령으로서도 쉽게 대타협의 명분을 만들 수 없다. 무엇보다 내년 총선을 앞두고 전통적인 지지층마저 떠나갈 경우 양손의 떡을 모두 놓칠 수 있다는 위기감도 깔려 있다. 하지만 문 대통령에게 점점 더 결단과 선택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