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훈민정음 먹칠한 1000억원

에너지경제신문 입력 2019.07.18 17:03

민병무 금융증권 에디터


1940년 어느 여름날, 간송 전형필(1906∼1962)은 경성제국대학에서 조선 문학을 가르치던 김태준으로부터 귀가 번쩍 뜨이는 이야기를 듣는다. 제자인 서예가 이용준이 "가보로 전해 내려오는 ‘훈민정음’이 있다"고 말했다는 것. 몇 년 전부터 훈민정음을 찾기 위해 애쓰던 전형필은 가슴이 뛰었다. 김태준은 즉시 이용준의 안동 시골집으로 내려가 살펴봤다. 비록 표지와 그 다음 첫장은 없었지만 해례본이 틀림없었다. 

훈민정음은 크게 ‘예의’와 ‘해례’로 나뉘어져 있다. 예의는 한글을 만든 이유와 한글의 사용법을 간략하게 설명한 글로 세종이 직접 지었다. 흔히 ‘언해본’으로 부른다. 국어 교과서에 나오는 "나라 말씀이 중국과 달라"로 시작되는 문장이 바로 언해본 첫머리에 나오는 글이다. 해례는 글자를 만든 원리가 설명된 해설서다. 한글 창제 후 3년이 지난 세종 28년(1446년)에 한글 반포와 동시에 발행됐다. 

해례본이 전형필의 손에 들어 온 것은 꼬박 3년이 흐른 1943년 6월이다. 사회주의자인 김태준은 1941년 체포돼 2년의 옥살이 끝에 1943년 병보석으로 풀려난다. 두 사람 모두 유명인사였기에 접촉이 쉽지 않았다. 김태준은 이용준의 주소를 알려 주었고 전형필은 일제의 감시와 위협을 무릅쓰고 마침내 훈민정음을 인수한다. 전형필은 역시 ‘인물’이었다. 책값으로 1000원을 불렀으나 그 10배인 1만원을 지불했다. 당시 서울 시내 기와집 10채를 살 수 있는 엄청난 거액이다. 거기에 더해 소개비로 1000원을 따로 줬다. 민족의 자긍심을 지키기 위해 훈민정음 해례본이 이 정도 대접은 받아야 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멋진 에피소드는 또 있다. 이충렬이 2010년에 쓴 '간송 전형필'에 따르면 훈민정음 해례본은 ‘장물’이었다. 이용준이 자신의 아내 집안 서고에 있던 책을 몰래 가져와 자기 것으로 속여 팔은 것이다. 진흙탕 싸움이 벌어질 수도 있었지만, 원래 주인인 광산 김씨 가문은 통 큰 결단을 내린다. "우리 집안 책이지만 간송이 진가를 알아봐 주기 전에는 귀한 책인지 몰랐다. 오히려 해례본을 세상에 알리고 잘 보전해줘 고맙다"라며 소유권 주장을 포기했다. 이런 보물을 송사에 휘말리게 하면 오히려 조상을 욕보이는 일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아름다운 스토리에 흠집이 나기 시작한 때는 2008년부터다. 상주에서 고서적 판매상을 하는 배익기씨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서적이 또 다른 해례본이라며 공개했다. 감정 결과 진품이었지만 법적공방이 이어졌다. 조모씨는 "배씨가 내 가게에서 훔쳐갔다"라고 주장하며 소유권 논쟁이 촉발됐다. 대법원은 2011년 조씨에게 소유권이 있다고 최종 확정했다. 조씨는 2012년 문화재청에 상주본을 기부하겠다는 뜻을 밝히고 숨져 소유권은 현재 국가에 있다. 그런 가운데 지난 15일 상주본을 갖고 있는 배씨가 서적 회수 강제집행을 막아달라며 국가를 상대로 낸 소송에서 최종 패소했다. 문화재청이 실력행사에 나설 명분이 더 커졌지만 회수 가능성은 여전히 불투명하다. 정재숙 문화재청장은 18일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에 출석해 "검찰 수사 의뢰를 통해 상주본 압수수색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상주본은 2017년 잠깐 모습을 드러냈다. 아래쪽이 불에 그슬린 처참한 상태였다. 배씨는 2015년 집에 화재가 발생해 상주본이 일부 탔지만 크게 훼손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공개 이유는 불순했다. 국회의원 재보궐 선거에 출마하면서 재산신고 때 1조원을 등록하려고 했다. 선거관리위원회가 "실물 보유를 확인할 수 없다"는 이유로 이의를 제기하자, 불에 탄 상주본 사진을 공개했다. 스스로 상주본 가격을 1조원으로 책정한 것이다. 

최근 충격적인 소식이 계속 들린다. 배씨는 "최소 1000억원은 줘야 넘기겠다" "주운 돈도 5분의 1은 주니까 나한테 10분의 1은 내놔야 한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결국 가이드라인으로 1000억원을 제시한 것이다. 전형필 선생이 통곡할 일이다. 세상엔 돈으로 값어치를 매기지 못하는 일도 있다는 진리를 모르는 것 같아 안타깝다. 몇 해 전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훈민정음 안동본을 본 적이 있다. 어서 빨리 상주본도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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