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E칼럼] 베스트셀러의 함정, 유행을 쫓는 심리

에너지경제신문 입력 2019.08.06 17:13

전경우 미래커뮤니케이션연구소 대표


우리나라 최초의 베스트셀러 책으로 정비석의 소설 ‘자유부인’을 꼽는다. 1954년 출간된 이 소설은 대학교수 부인이 사교댄스를 추러 다니고 외간 남자와 자유롭게 연애를 한다는 내용이다. 대학교수라는 점잖은 신분의 아내가 미국식 자유연애를 하는 이야기에 출판시장이 후끈 달아올랐다. 서울대 법대 교수와 작가가 작품을 놓고 지상논쟁을 펼치는 등 소설은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켰다.

사실 베스트셀러의 역사를 좀 더 거슬러 올라가면 일제 강점기에 닿게 된다. 1917년 매일신보에 연재되고 그 다음해에 책으로 출간된 이광수의 소설 ‘무정’은 1만부나 팔려나갔다.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높은 판매고다. 유교 관습에 얽매인 전통적인 사랑을 마다하고 자유연애를 한다는 줄거리다. 이 소설은 이후 1980년대 한국문학전집 같은 곳에서 빠지지 않는 아이템이었을 정도로 오랜 기간 베스트셀러로 인기를 누렸다.

1980년대 들어 출판시장이 호황을 누리면서 본격적인 베스트셀러 경쟁에 들어갔다. 지금이야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 이야기로 들리겠지만 당시 시집이 몇 백 만권씩 팔리던 호시절이었다. 1988년 대형서점에서 주간 단위 베스트셀러 집계를 하면서 도서 순위 경쟁에 불을 붙였다. 대형서점에서 나오는 베스트셀러 순위는 각 신문 문화면에 그대로 실렸고, 그것이 실제 도서 판매에 직결되었다.

이 때문에 출판사들은 베스트셀러 목록에 자사 출판물을 올리기 위해 갖은 애를 썼다. 광고에 엄청난 비용을 쏟아 붓는 한편 서점 베스트셀러 순위를 올리기 위한 꼼수를 쓰기도 했다. 아르바이트생을 시켜 자사 출판 책을 사들여 순위를 올리는, 이른바 사재기를 했던 것이다. 이것이 문제가 되자 사재기를 하지 말자는 자정 운동을 하거나 단체를 통해 단속에 나서고 법적 대응을 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사재기는 사라지지 않았다. 나중에 서점의 베스트셀러 집계 발표가 사라지면서 사재기 관행도 줄어들었다.

순위로 치자면 가요시장도 빼놓을 수 없다. 아득한 시절, 각 방송사에서는 주말마다 이 주의 가요 순위를 발표하였다. 팬들은 과연 누가 1등을 할 것인가 지켜보느라 브라운관 앞으로 모여들었다. 대개는 팬들이 보내준 엽서의 양에 따라 순위를 결정했고 팬들은 앞 다퉈 자신이 좋아하는 가수를 위해 엽서를 사고 우체국에서 부쳤다.

지금이야 엽서를 보내거나 받는 일이 없지만 당시만 해도 엽서는 팬심을 측정하는 최고의 수단이었다. 좋아하는 방송 프로그램에 엽서를 보내 듣고 싶은 곡을 신청하기도 하고 좋아하는 가수에게 보내는 응원의 메시지를 전달하기도 했다.

한때 최고의 스타로 인기를 누렸던 어느 가수의 매니저는 방송사 가요순위 프로그램에서 1등을 하기 위해 엽서를 훔치는 일도 있었다. 방송사에 산더미처럼 쌓인 엽서를 분류하던 방으로 들어가 경쟁 가수 몫으로 온 엽서를 자루 채 들고 줄행랑을 친 것이다. 학원 강사 출신인 어느 매니저는 전국의 학원에 연락하여 학원에 다니던 원생들의 엽서를 무더기로 받아 자신이 데리고 있던 가수를 가요 순위 프로 1등에 올리기도 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할지 모르겠으나, 그때는 그랬다.

남들 하는 대로 좇아가는 유행의 심리가 시장에서도 통하는 법이다. 남들이 좋아하는 책을 사고, 남들이 듣는 노래를 듣고, 남들이 찾는 영화를 찾아보는 것이다. 그래야 선택에서 실패할 확률이 적고 시대의 흐름에 뒤처지지 않는다는 안도감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시대만 달라졌지 순위를 보고 상품을 선택하는 습관은 여전하다. 음원시장에서도 사재기 이야기가 나오고, 가요 신인 선발 프로그램에서도 순위 조작 때문에 시끄럽다. 공정하게 하는 것도 좋지만, 남들이 좋다 한다고 무턱대고 따라하는 소비자 습관도 다시 생각해 보면 좋겠다.

민경미 기자 기자 기사 더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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