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원유수요 2940만배럴로↓
유가 하락에 사우디 자금확보 비상등
美수출 줄여 원유재고 감소 유발
中수출 확대 수익 확보 방안도
▲(사진=연합) |
올해 들어 계속된 원유 감산 조치에도 수요 둔화 우려로 국제유가가 내리막길을 걷자 사우디아라비아는 미국의 수출량을 줄이는 방식으로 국제유가 끌어올리기에 나섰다.
지난 21일(현지시간) 뉴욕상업거래소(NYMEX)에서 10월 인도분 서부 텍사스산 원유(WTI)는 전 거래일보다 배럴당 0.8%(0.45달러) 내린 55.68달러에 거래를 마쳤다. 반면 런던 ICE 선물거래소의 10월물 브렌트유는 배럴당 0.45%(0.27달러) 오른 60.30달러에 장을 마감하는 등 국제유가는 혼조세를 나타냈다.
미중 무역전쟁과 글로벌 경기 둔화 조짐에 따른 원유 감소 우려가 여전한 가운데 미국의 원유 및 가솔린 재고가 유가에 영향을 미쳤다. 실제 무역분쟁의 장기화로 인해 중국과 독일 등 주요국 경기 부양 가능성이 부각되면서 국제유가는 지난 20일(현지시간) 상승세를 기록했다. 그러나 미국 원유재고가 예상보다 큰 폭 감소한 반면 정제유 등 석유제품 재고가 비교적 큰 폭 증가하면서 수요 둔화에 대한 우려로 유가는 하루만에 하락세로 반전했다.
▲지난 3개월간 국제유가 (WTI) 추이. |
미 에너지정보청(EIA)이 발표한 지난주 미국 원유재고는 약 273만 배럴 감소한 것으로 집계된 가운데 이는 시장 예상 150만 배럴 감소보다 큰 폭 줄었다. 하지만 휘발유 재고는 약 31만 배럴 증가했고, 정제유 재고는 261만 배럴 늘면서 예상치를 웃돌았다.
어게인 캐피탈 매니지먼트의 존 킬두프 파트너는 "휘발유 수요가 드라이빙 시즌 피크를 지나 앞으로는 감소 추세를 보일 수 있다"고 진단했다.
브렌트유의 경우 미국과 이란의 갈등으로 인해 상승마감했지만 전문가들은 최근 유가 반등에도 경기 둔화와 수요부진 우려로 인해 유가 상승세에 힘이 빠질 것이라고 내다보고 있다.
삭소뱅크의 올레 한센 원자재 전략 담당 대표는 "최근 안도 랠리도 경기 침체 위험이 유가를 다시 끌어내릴 수 있다는 우려를 제거하지는 못했다"고 평가했다. 싱가포르 소재 컨설팅업체 베일러 마켓의 스티븐 애널리스트는 "미중 무역전쟁에 따른 불확실성이 지속될 경우 원유수요에 대한 우려감이 해소되는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이와 관련, 석유수출국기구(OPEC)도 글로벌 경제에 대한 우려로 인해 원유시장에 대한 비관적인 입장을 내비쳤다. OPEC은 최근 보고서를 통해 올해 원유 수요증가 전망치를 110만 배럴로(bpd) 하향 조정했으며 이는 이전 전망보다 4만 배럴 줄인 수준이다. OPEC은 또 올해 공급 증가량은 과거 전망치 대비 7만 2000 배럴 적은 197만 배럴을 기록할 것으로 예상했다.
OPEC은 또한 2020년부터 글로벌 원유시장은 과잉공급이 불가피하다고 진단했다. 특히 글로벌 원유수요의 경우 올해는 3070만 배럴 정도 기록할 것으로 보이지만 내년은 이보다 줄은 2940만 배럴로 예상됐기 때문이다. OPEC은 "세계 경제의 불확실성이 여전히 크다"면서 "세계 경제의 하방 위험이 지배적이다"고 지적했다.
오일프라이스닷컴의 닉 커닝엄 연구원은 "드론 공격 사태와 같은 미이란 갈등으로 인한 유가 상승은 일시적인 현상으로 판단된다"며 "원유시장에 가장 중요한 인은 현재 수요를 결정짓는 글로벌 경기상황이다"고 설명했다. 블룸버그도 "최근 몇 개월 동안 중동지역 정세불안으로 유조선과 원유시설들이 공격받았음에도 과잉공급은 핵심적인 악재로 거론되고 있는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이에 따라 OPEC이 추가적인 감산 조치를 단행할 수도 있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특히 ‘셰일혁명’에 힘입은 미국의 산유량은 내년까지도 증가할 것으로 보이지만 내년 원유수요가 올해보다 더 적을 것으로 예상됨으로 국제유가는 산유국의 추가 감산없이 본격적인 하락 국면에 진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PVM의 스티븐 브레녹은 "원유시장의 이러한 약세전망은 OPEC이 앞으로 유가를 지지하기 위해 추가적인 조치를 취하도록 압력을 받게 될 것이다"고 전했다.
◇ OPEC의 공급과잉 전망…발등에 불 떨어진 사우디
이렇듯 글로벌 원유시장이 앞으로도 추가로 하락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면서 발등에 불이 떨어진 곳은 단연 OPEC의 맹주 격인 사우디아라비아 사우디는 최근 아람코의 기업공개(IPO)를 앞두고 올 상반기 실적을 공개한 데 이어 인도 정유업체 릴라이언스인더스트리스의 지분 20% 매입에 나서는 등 ‘사우디 비전2030’ 실현을 위한 자금확보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비전 2030은 사우디 산업구조를 석유위주에서 탈피해 다각화하려는 경제정책이다.
특히 아람코가 최근 릴라이언스인더스트리스를 인수한 배경에는 아람코가 원유 생산 뿐 아니라 정유에서도 글로벌 위상을 높이려는 조치로, IPO를 앞두고 주식 투자자들에게 보내는 산업 다변화 신호로 관측되고 있다. 아람코는 2020년 또는 2021년을 IPO 목표로 삼았으며 주식의 5%를 팔아 1천억 달러(약 121조8천억원)를 모으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주목할 점은 유가 하락이 현실화될 경우 아람코의 실적이 지금보다 더 악화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실제 올해 1월부터 6월까지 아람코의 순이익은 469억 달러(약 57조 2000억원)로 전년 동기 대비 12% 감소했다. 이는 같은 기간 국제유가가 4% 하락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사우디는 고유가가 절실해진 상황이다. 유가하락으로 아람코의 실적이 추가로 악화되면 투자 매력도도 떨어질 수 밖에 없다.
하지만 문제는 사우디가 산유국들과의 ‘감산 카드’를 통해 유가 반등에 총력전을 펼치고 있음에도 이에 대한 약발이 시장에 전혀 먹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미중 무역전쟁의 장기화로 인해 글로벌 경기 침체가 이어지면서 시장 참여자들은 산유국들의 공급감축보다는 경기둔화에 따른 수요위축 여부를 더욱 주시하고 있다. 닉 커닝엄 연구원은 "향후 유가흐름은 OPEC의 손을 벗어났다"며 "최근 유가를 움직이는 요인은 거의 전적으로 세계 경제에 대한 정서적 변화에서 기인된다"고 설명했다.
▲사우디의 대중(청색), 대미(노랑색) 원유수출량 추이(자료=미CNBC) |
일각에서는 사우디가 유가 하락에 대응하기 위해 새로운 카드를 택했다는 의견이 제기되고 있다.
오일프라이스닷컴과 CNBC 등 주요 외신은 최근 사우디가 지난 몇 개월 동안 대미(對美) 원유수출을 대폭 줄인 동시에 대중(對中) 원유수출을 급격히 늘렸다고 보도했다. 실제 유조선 항로 추적업체인 탱커트래커스(TankerTrackers)에 따르면 사우디는 지난 7월 180만 2788 배럴(bpd) 어치의 원유를 중국에 수출했는데 이는 지난해 8월( 92만 1811 배럴) 물량 대비 거의 두 배 증가한 수준이다. 반면 사우디는 같은 기간 대미 원유수출량을 68만 7946배럴에서 26만 2053배럴로 62% 감축했다.
블룸버그가 따로 집계한 유조선 추적 데이터에서도 지난 7월 사우디는 174만 배럴의 원유를 중국으로 수출했다. 같은 기간 대미 수출량은 16만 배럴로 집계됐는데, 이는 블룸버그가 2017년 1월부터 통계를 집계한 이후 사상 최저 수준이다.
전문가들은 사우디의 이러한 행보를 통해 ‘일석이조’ 효과를 누릴 수 있을 것이라고 해석했다. 우선 세계에서 가장 투명한 시장으로 여겨지는 미국에 대한 수출량을 줄임으로써 미국의 원유재고량을 감소시킬 수 있다. OPEC, 미 에너지정보청(EIA), 원유 트레이더 등과 같은 시장 참여자들은 미국의 원유재고 상황을 참고하면서 시황에 대한 결론을 내리기 때문에 미국의 원유재고가 줄어들면 공급부족 우려로 유가가 오를 수 있다. 에너지 연구회사 케이로스(Kayrros)의 안토인 할프 공동 창업자는 "사우디는 가장 투명하고 면밀히 관찰되고 있는 시장지표로 여겨지는 미국 원유재고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분석했다.
두번째는 세계 최대 원유수입국이자 시장 투명성이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중국으로 원유 수출을 늘림으로써 ‘수익 확보’라는 효과를 꾸준히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 중국의 원유재고 지표에 대한 시장 참여자들의 신뢰도는 전반적으로 낮은 것으로 알려졌다. 할프는 "중국 원유재고에 대한 벤치마크(기준) 조차 존재하지 않는다"며 "원유 생산자들도 미국이나 기타 경재협력개발기구(OECD) 국가의 원유재고보다 중국 원유재고에 대해 훨씬 덜 걱정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외에도 미국의 대(對)이란 제재와 저유가로 인해 더 많은 사우디산 원유가 중국으로 공급될 수 있었다는 설명도 나온다.
이에 따라 전문가들은 사우디가 미국시장에 원유공급을 줄임으로써 공급차질에 대한 우려를 야기시킴과 동시에 ‘원유 블랙홀’이라고 불리는 중국을 향해 원유수출을 늘려 수익을 챙길 수 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특히 중국 원유재고에 대한 신뢰도가 낮기 때문에 사우디가 대중 원유수출을 늘리더라도 글로벌 원유시장의 펀더멘털에 끼치는 영향력은 미미하다는 주장이다.
할프는 "중국은 매우 능통하면서 빈틈이 없는 구매자인데, 수출업체들은 아무 이유 없이 이들에게 원유를 공급하지 않는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