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경영·고객중심 경영의 표본’ 구자경 LG 회장 별세..."장례일정 비공개"(종합)

에너지경제신문 입력 2019.12.14 13:34

구 명예회장 재임 기간 LG그룹 매출 1150배 성장
1950년 락희화학 입사...45년간 LG그룹 경영 전념
70여개 연구소 설립...대한민국 기술수준 비약적 발전
민간기업 최초 기업공개...투명경영 활성화 앞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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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자경 LG 명예회장.


[에너지경제신문 나유라 기자] ‘강토소국 기술대국(疆土小國 技術大國)’의 신념으로 우리나라 화학·전자 산업의 중흥을 이끈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이 14일 오전 10시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4세.

장례는 고인과 유족들에 따라 가족장으로 쵣한 차분하고 조용하게 치르기로 했다.

LG그룹은 "유족들이 온전히 고인을 추모할 수 있도록 별도의 조문과 조화는 정중히 사양한다"며 "빈소와 발인 등 구체적인 장레 일정도 외부에 알리지 않기로 했음을 양해 바란다"고 밝혔다.

구 명예회장의 장남인 고(故) 구본무 회장이 지난해 별세했을 때도 소탈하고 겸손하게 살아온 고인의 뜻을 따르기 위해 비공개 가족장을 치르겠다고 밝힌 바 있다.


◇ 1950년 락희화학공업주식회사 입사...45년간 경영 전념

故 구자경 명예회장은 구인회 LG 창업주의 장남으로, 1925년 경남 진주시 지수면에서 태어났다.

구 명예회장은 LG그룹 창업 초기이던 1950년 스물 다섯의 나이에 모기업인 락희화학공업주식회사에 입사해 명예회장으로 경영일선에서 은퇴할 때까지 45년간 기업 경영에 전념했다.

원칙 중심의 합리적 경영으로 LG를 비약적으로 성장시키고 명예롭게 은퇴한 ‘참 경영인’으로 불린다.

LG 창업주인 연암 구인회 회장이 62세를 일기로 1969년 12월 31일 타계함에 따라 구 명예회장은 45세가 되던 1970년 1월 9일 LG그룹의 2대 회장으로 취임했다. 공장에서 20년간 생산현장을 지키다 서울로 근무지가 바뀐 지 불과 1년 수 개월 만에 부친의 유고로 마음의 준비 없이 회장 자리에 오른 구 명예회장은 이후 두 차례의 석유파동과 나라 안팎의 어려운 경영환경을 극복하고, 화학?전자 산업 강국을 위한 도전과 21세기 선진 기업 경영을 위한 혁신의 시대를 펼쳤다.


◇ 25년간 회장 재임 기간 LG그룹 매출 1150배 성장

특히 구 명예회장은 ‘기술입국(技術立國)’의 일념으로 화학과 전자 분야의 연구개발에 열정을 쏟아 70여 개의 연구소를 설립했으며, 수많은 국내 최초 기술과 제품을 개발해 LG의 도약과 우리나라의 산업 고도화를 이끌었다.

또 그는 과감하고 파격적인 경영 혁신을 추진해 자율경영체제 확립, 고객가치 경영 도입, 민간기업 최초의 기업공개, 한국기업 최초의 해외 현지공장 설립 등 기업 경영의 선진화를 주도한 혁신가였다.

구 명예회장이 25년 간 회장으로 재임하는 동안 LG그룹은 매출 260억원에서 30조원대로 약 1,150배 성장했고, 임직원 수도 2만명에서 10만명으로 증가했다. 주력사업인 화학과 전자 부문은 부품소재 사업까지 영역을 확대해 원천 기술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는 수직계열화를 이루며 지금과 같은 LG그룹의 모습을 갖출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


◇ ‘민간연구소 1호’ 럭키중앙연구소 출범...재임기간 70여개 연구소 설립


구 명예회장은 1970년대 중반 럭키 울산 공장과 여천 공장이 채 가동되기도 전에 연구실부터 만들 정도로 ‘연구 활동’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1979년에는 대덕연구단지 내 민간연구소 1호인 럭키중앙연구소를 출범시켰다. 여기서는 고분자·정밀화학 분야를 집중 연구하여 엔지니어링 플라스틱, ABS수지 등 다양한 신제품 개발로 플라스틱 가공산업의 기술고도화를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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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자경 LG 명예회장이 연구소, 생산 현장을 살피고 있다.

이어 1985년에는 금성정밀, 금성전기, 금성통신 등 7개사가 입주한 안양연구단지를 조성하는 등 회장 재임기간 동안 70여 개의 연구소를 설립했다.

또 같은 해인 1985년에 우리나라 최초의 제품시험연구소를 개설하고, 이곳에 가혹 환경 시험실, 한냉·온난 시험실, 실용 테스트실 등 국제적 수준의 16개 시험실을 갖춰 금성사 제품의 품질을 끌어올리는 견인차 역할을 하게 했다.

구 명예회장의 이 같은 연구개발에 대한 신념 뒤에는 우리 기술로 우리 국민들의 삶을 윤택하게 하고, 우리나라의 산업과 기업의 수준을 한층 선진화해야겠다는 비장한 사명감이 담겨 있었다.

구자경 명예회장이 강력하게 추진한 기술 연구개발의 결과로 금성사는 19인치 컬러TV, 공냉식 중앙집중 에어컨, 전자식 VCR, 프로젝션 TV, CD플레이어, 슬림형 냉장고 등 영상미디어와 생활가전 분야에서 수많은 제품을 국내 최초로 개발해 국내 최고의 가전 회사로서 입지를 굳혀 나갔다.

당시를 회상하며 구 명예회장은 "1970년에 냉장실과 냉동실을 분리한 2중 구조의 ‘투 도어 냉장고’를 개발한 것과, 74년에 개발한 가스레인지, 77년 19인치 컬러TV를 생산한 것 등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고 밝히기도 했다.


◇ 민간기업 최초 기업공개...‘투명경영’ 활성화 앞장


구 명예회장은 1970년대에 잇단 기업공개(IPO)로 우리나라 초기 자본시장에 활력을 불어 넣고, 민간 기업의 투명경영을 선도했다.

당시만 해도 기업공개를 기업을 팔아 넘기는 것으로 오해해 이를 우려하는 분위기였고, 일부 임원들도 IPO를 반대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국내 민간 기업 가운데 지금까지 IPO를 단행한 기업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구 명예회장은 기업공개가 앞으로 거스를 수 없는 큰 흐름이 될 것이며, 선진 기업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이라는 믿음을 꺾지 않았다.

결국 구 명예회장의 ‘뚝심’을 발판으로 1970년 2월 그룹의 모체 기업인 락희화학이 민간 기업으로서는 국내 최초로 증권거래소에 상장했다.

이어 전자 업계 최초로 금성사가 기업공개를 하면서 주력 기업을 모두 공개한 한국 최초의 그룹이 됐다. 이후 금성통신(1974), 반도상사·금성전기(1976), 금성계전(1978), 럭키콘티넨탈카본 (1979) 등 10년간 10개 계열사의 기업공개를 단행해 안정적인 자금 조달을 통한 도약의 기반을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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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9월 구 명예회장(사진 가운데)이 한-독 경제교류에 대한 공로로 독일 정부로부터 유공대십자훈장을 받고 있다.

또 구 명예회장은 다른 기업들보다 한 발 앞서 우리나라 기업의 활동 지평을 세계로 확장시켜, 재임하는 동안에만 50여 개의 해외법인을 설립했다. 특히 1982년 미국 알라바마주(州)의 헌츠빌에 컬러TV 생산공장을 세웠다. 이 공장은 국내 기업으로서는 최초로 설립된 해외 생산기지였다.

당시 뉴욕타임즈는 금성사 헌츠빌 공장 설립에 대해 "한국의 기업이 이제는 미국 사회에서도 성공적으로 뿌리를 내리는 계기가 되었다"고 평가했고,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에서도 성공적인 해외 진출 케이스로 헌츠빌 공장을 연구하기도 했다.


◇ ‘자율과 책임경영’ 체제 도입...혁신전도사 역할 자처


전문경영인 중심의 ‘자율과 책임경영’ 체제를 도입한 것도 구 명예회장의 성과 중 하나로 꼽힌다. 구 명예회장은 개방과 변혁이 소용돌이 치는 1980년대를 겪으면서 국경 없는 국제 경쟁을 예견하고 깊은 위기감을 느꼈다. 이에 그는 스스로 경영혁신 방향 수립을 진두지휘 해 1988년 21세기 세계 초우량기업으로 도약을 목표로 한 ‘21세기를 향한 경영구상’이라는 변혁방향을 발표했다.

이는 사업전략에서 조직구조, 경영스타일, 기업문화에 이르기까지 그룹의 전면적인 경영혁신을 담은 것이다. 특히 특히 회장 1인의 의사결정에 의존하는 관행화 된 경영체제를 과감하게 벗어 던지고 선진화된 경영 체제를 정착시키기 위해 ‘자율과 책임경영’을 절대절명의 원칙으로 내세웠다.

구 명예회장이 주창한 ‘자율과 책임경영’은 고객과 사업을 잘 아는 전문경영인이 권한을 갖고, 자율적으로 사업을 수행하며, 그 결과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라는 것이었다. 지금은 전문경영인 체제가 보편적이지만, 당시로서는 LG 내부에서도, 그리고 재계에서도 선뜻 실행하기 어려운 파격적인 경영체제 개념이었다.

시행 초기 그룹 내부에서도 ‘중요한 결정 권한은 회장이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의견이 끊임없이 제기됐다. 계열사 사장들 또한 타율적인 태도를 쉽게 버리지 못해 회장을 찾아가 의사결정을 요청했다가 질책과 훈계를 듣고 나오곤 했다.

구 명예회장은 이런 경영혁신 활동이 선언적으로 그치지 않도록 직접 ‘혁신 전도사’ 역할을 자처했다. 구 명예회장은 일일이 임직원들을 만나 경영혁신의 필요성을 설득하고 이해시키는데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 꼬박 2년에 걸쳐 그룹 전 임원 500여명과 오찬 미팅을 가졌고, 어느 해에는 1년 동안 현장의 임직원들과 간담회 형태의 대화 자리를 140여차례나 갖기도 했다.


◇ 국내 최초 대기업 ‘무고승계’...은퇴 후 교육활동 주력


구자경 명예회장은 1995년 2월, LG와 고락을 함께 한 지 45년, 회장으로서 25년의 세월을 뒤로 하고 스스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이는 국내 최초의 대기업 ‘무고(無故) 승계’로 기록되며 재계에 신선한 파장을 일으켰다.

아직 은퇴를 거론할 나이가 아닌 시기에 그 같은 결정을 내린 것은 경영혁신의 일환으로 경영진의 세대교체가 필요하다고 결심한 데 따른 것이었다.

1995년 2월 회장 이·취임식장에서 구 명예회장은 "돌이켜 보면 행운보다는 고통이, 순탄보다는 고난이 더 많았던 세월이었지만, 임직원들의 헌신적인 노고가 늘 곁에 있었기에 용기와 신념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고 밝혔다.

구 명예회장은 "끊임없는 변화와 혁신이 요구되는 이 시점에서 여러분을 믿고 나의 역할을 마치고자 한다. 이제 공인의 위치에서 평범한 자연인으로 돌아가게 되니 벌써 세월이 이렇게 흘렀나 싶어서 무상감도 들지만, 젊은 경영자들과 10만 임직원에 대한 믿음이 있기에, 기쁘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나의 자리를 넘기고자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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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 이후 버섯 재배를 연구 중인 구자경 LG 명예회장.

구 명예회장이 회장에서 물러날 때 창업 때부터 그룹 발전에 공헌을 해 온 허준구 LG전선 회장, 구태회 고문, 구평회 LG상사 회장, 허신구 LG석유화학 회장, 구두회 호남정유에너지 회장 등 창업세대 원로 회장단도 젊은 경영인들이 소신 있게 경영활동을 펼칠 수 있도록 ‘동반퇴진’을 단행했고, 이러한 모습은 당시 재계에 큰 귀감이 됐다.

구 명예회장은 경영일선에서 물러난 뒤에는 교육 활동과 공익재단을 통한 사회공헌활동에 관여해 왔다. 그는 충남 천안시 성환에 위치한 연암대학교의 농장에 머물면서 은퇴 이후 버섯연구를 비롯해 자연과 어우러진 취미 활동에 열성을 쏟으며 하루하루 바쁜 일정을 보냈다.

구 명예회장은 슬하에 지난해 타계한 구본무 LG 회장과 구본능 희성그룹 회장, 구본준 LG 부회장, 구본식 희성그룹 부회장 등 6남매를 뒀다. 부인 하정임 여사는 2008년 1월 별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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