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 유가전쟁 목표는..."생산단가 높은 美셰일 무너뜨려라"

에너지경제신문 입력 2020.03.10 14:17

러시아-사우디 유가전쟁 본격화...유가 24.6%폭락
1991년 이후 최대 낙폭 기록
미 석유산업 침체시 경제 타격
미 에너지독립 위상마저 흔들
생산비용 높은 미 셰일, 존폐위기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좌),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우)


사우디아라비아와 러시아를 둘러싼 ‘유가 전쟁’의 전운이 드리워지면서 발발 배경에 대해 관심이 쏠린다.

앞서 산유국들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에 따른 ‘수요 쇼크’를 완화하기 위해 이달 6일 추가감산을 논의했지만 러시아의 반대로 합의하지 못했다. 여기에 러시아는 당장 다음달부터 증산에 나서겠다고 엄포를 놓기도 했다. 이에 맞서 석유수출국기구(OPEC)의 맹주격인 사우디도 원유가격 인하에 나서는 한편 증산 가능성도 시사하면서 ‘유가 전쟁’이 발발할 것이라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와 러시아가 서로 증산에 나서겠다고 예고한 배경에는 저유가 국면에 대비해 글로벌 원유 시장 점유율을 끌어올리려는 전략으로 보인다.

여기서 더 나아가 일각에서는 러시아가 저유가라는 기회를 틈타 미국의 석유 산업에 이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자랑해온 ‘에너지 독립’을 무너뜨리겠다는 의도가 깔렸다는 분석이 나온다.


◇ 저유가의 최대 피해자는 美 셰일…"수익성 악화"


▲3개월 WTI 가격추이


미 경제매체 CNBC, 월스트리트저널(WSJ) 등 주요 외신은 사우디와 러시아 간의 유가 전쟁으로 인해 미국의 석유 산업이 최대 피해를 입을 것으로 전망했다, 미국의 셰일 오일이 사우디나 러시아에 비해 원유생산단가가 상대적으로 높기 때문이다.

국제에너지기구(IEA)에 따르면 미국 셰일의 원유생산 원가는 배럴당 30달러 전후로 파악된다. 사우디와 러시아의 원가는 배럴당 각각 10달러, 17달러로 미국의 셰일 오일보다 낮다. WSJ는 유가가 배럴당 50달러 이상 유지돼야 셰일 오일의 시장성이 있다고 보고 있다. 이는 사실상 저유가 현상이 장기화될 경우 미국이 불리해진다는 의미다.

문제는 최근 국제유가가 2거래일 연속 급락세를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지난 9일(현지시간)의 경우 20% 이상의 대폭락을 기록하기도 했다.

이날 뉴욕상업거래소(NYMEX)에서 4월 인도분 서부 텍사스산 원유(WTI)는 전 거래일보다 배럴당 24.6%(10.15달러) 떨어진 31.13달러에 거래를 마쳤다. 런던 ICE 선물거래소의 5월물 브렌트유도 배럴당 24.10%(10.91달러) 급락한 34.36달러를 기록했다.

전문가들은 앞으로 국제유가가 추가로 하락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골드만삭스는 "OPEC과 러시아의 석유 가격 전쟁이 명백히 시작됐다"면서 2분기와 3분기 브렌트유 가격 전망을 배럴당 30달러로 낮췄으며 최저 20달러까지 추락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처럼 저유가 현상이 지속되면 사우디와 러시아에 비해 상대적으로 비용이 높은 미국 셰일업체들은 이를 감당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국제신용평가사 무디스는 미국의 석유산업이 2024년까지 상환해야 할 부채규모가 약 860억 달러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했다. 앞으로 국제유가가 반등하지 않는다면 셰일업체들의 수익성이 악화되고, 부채상환이 어려워지면서 결국 존폐위기에 처해진다.

석유전문가인 다니엘 여진은 10일 미 경제매체 CNBC와의 인터뷰를 통해 "셰일 업계는 현재 매우 위험한 상황에 놓였다"이라며 "앞으로 많은 파산을 보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CNBC 소속 짐 크래머는 본인이 주시하는 35개의 셰일 업체 중 최대 10개 기업이 파산될 것으로 내다봤다.

미국 석유 산업이 저유가에 유난히 취약한 탓은 셰일 업체들이 과거 2014∼2016년 유가폭락 기간 동안 산유국들과의 치킨게임에서 승리한 이후에도 수익성 개선보단 외형 확장을 이어갔기 때문이다. 특히 지난 2년 동안 넘게 지속된 미중 무역전쟁으로 유가가 완만한 하락세를 이어갔음에도 선진국 중앙은행의 통화완화 정책으로 외형을 불릴 수 있었다.

이와 관련, 신한금융투자 하건형 애널리스트는 "유가가 손익분기점을 하향 돌파하면서 수익성 악화가 우려되고 있다"며 "지난 3년 넘게 진행된 외형 확장으로 재무구조는 취약해졌고, 현재는 자금조달 리스크까지 부상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 露, 美 셰일 무너트려 ‘에너지 독립’ 흔든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사진=AP/연합)


저유가로 흔들리는 것은 미국의 셰일 업계 뿐만이 아니다. 미국의 석유 산업이 저유가로 무너지면 미국 경제의 침체는 물론 한발 더 나아가 ‘에너지 독립’을 선언한 미국의 위상마저 흔들릴 수 있다. 미국이 그간 세계에 막대한 영향력을 펼칠 수 있었던 건 바로 이 ‘에너지 독립’의 힘이 컸다.

결국 전문가들은 러시아가 유가 전쟁을 통해 미국의 에너지 독립을 빼앗는 한편 세계 질서에서 주도권을 잡겠다는 복안이라고 분석했다.

10일 캐나다왕립은행(RBC)의 글로벌 원자재 부문 전략가인 헬리마 크로프트는 "OPEC 측은 사우디와 러시아가 저유가를 계기로 협상에 다시 나서기를 희망하는 분위기지만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빠르게 굴복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러시아의 전략은 셰일 업체를 노리는 것 뿐만이 아닌, 미국의 에너지 독립이 가져다 준 강압적인 제재방침을 겨냥하는 것처럼 보인다"며 "이에 산유국들의 대립 현상은 장기화될 것으로보인다"고 강조했다.

미국의 에너지 독립은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 후 제시한 6대 국정 기조 중 첫 번째인 ‘미국 우선 에너지 계획’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OPEC 의존에서 벗어나겠다며 셰일 오일 시추에 적극적으로 나서겠다고 공언했는데 그의 공언이 현실화됐다.

미국은 트럼프 행정부가 출범한 뒤 2018년 사우디와 러시아를 제치고 세계 최대의 산유국으로 거듭났다. 여기에 미국은 지난해 월간 통계 기준으로 ‘석유 순수출국’이라는 지위에 올랐다. 미 에너지정보청(EIA)에 따르면 올해는 연간 단위로도 순수출국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 美 경제제재에 분노하는 러시아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사진=AP/연합)


미국이 ‘미국 우선주의’를 앞세울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셰일 오일’의 힘이 컸다. 미국은 산유국들과 정치적, 외교적 이해 관계에서 벗어나 자국의 이익에 맞게 거리낌 없는 행보를 펼칠 수 있게 됐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주요 산유국인 러시아, 베네수엘라, 이란에 대한 경제제재다. 이와 관련 뉴욕타임스(NYT)는 "셰일가스가 미국에 외교적 권한을 부여했다"며 "휘발유 가격 상승에 대한 걱정없이 이란과 베네수엘라에 제재를 가할 수 있게 됐다"고 밝힌 바 있다. 크로프트 전략가도 "트럼프 행정부는 미국이 해외 국가들이 석유수출량을 줄이도록 처벌하면서도 이에 따른 가격 영향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다는 점을 꾸준히 자랑해왔다"고 말했다.

미국은 지난해 1월 니콜라스 마두로 베네수엘라 정권의 돈줄인 국영석유회사 PDVSA에 경제제재를 발효했다. 미국은 또 지난달 18일 베네수엘라 원유 판매와 운송을 중개한 러시아 국영 석유업체 로스네프트의 자회사인 ‘로스네프트 트레이딩 SA’를 제재 명단에 올리면서 마두로 정권을 돕는 러시아에도 경고를 보냈다.

2018년 11월에는 이란 제재를 전면 복원하면서 이란산 원유 금수조치를 발동했고 지난해에도 철강 금수조치를 추가했다. 여기에 이란혁명수비대를 외국 테러조직으로 지정하는 등 제재를 이어갔다.

아울러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 12월 ‘노드 스트림-2’ 사업에 참여하는 기업에 제재를 부과하는 내용이 포함된 법안에 서명하기도 했다. 러시아가 주도하는 ‘노드 스트림 2’ 사업은 러시아에서 발트해를 거쳐 독일로 이어지는 1200㎞ 구간에 천연가스를 수송하는 가스관을 건설하는 사업이다. 미국은 노드 스트림 2 가스관이 개통되면 유럽 에너지 시장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이 높아질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이와 관련, 금융정보업체 IHS마킷의 다니엘 예긴 부회장은 "러시아가 노드 스트림2 공사를 완료하기 직전에 중단하게 된 것은 엄청난 굴욕"이라고 설명했다.

푸틴 대통령이 유가 전쟁을 일으킨 점에 대해 외부의 조력을 받았다는 해석도 나온다. 크로프트 전략가는 "푸틴 대통령은 이고르 세친 로스네프트 회장으로부터 영향력을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세친 회장은 그동안 OPEC 감산 정책에 반대 의사를 표했으며 미국의 이러한 제재발표로 상당히 분노한 것으로 전해졌다. 세친 회장은 또한 푸틴 대통령과 함께 소련의 국가보안위원회(KGB) 출신으로 애국주의 성향이 강해 미국의 에너지 독립이 무너지다는 것은 본인과의 이데올로기에도 부합한다는 시각이 나온다.

크로프트 전략가는 그러면서 "세친 회장의 의도는 단순 원유시장에 대한 미 셰일 업체들의 점유율을 제거하는 게 아닌, 미국에서 넘쳐나는 에너지 자원을 바탕으로 공격적인 제재정책을 없애는 데 있다"고 말했다.

미국 에너지부는 지난 9일(현지시간) 저녁 성명에서 미국이 앞으로도 세계 1위의 에너지 생산국 지위를 유지할 것이라고 밝혔다. 에너지부는 "원유시장을 조정하고 충격을 가하는 외부세력들이 있다는 점은 안정적인 에너지공급 국가인 미국의 역할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시키는 것"이라며 "미국은 세계 최대 산유국인만큼 이러한 변동성을 견딜 수 있고 견딜 것이다"고 강조했다.


[에너지경제신문 박성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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