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유시추기(사진=AP/연합) |
국제유가가 급락세를 보이면서 배럴당 20달러선이 위태로운 가운데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가 유가를 좌우하는 ‘게임 체인저’가 될 수 있다는 진단이 나왔다. 코로나19에 따른 원유수요 침체의 규모가 종잡을 수 없을 정도로 커진 탓에 사우디아라비아와 러시아 간의 ‘유가 전쟁’이 해결되어도 원유시장이 회복될지는 미지수라는 주장도 덩달아 제기되고 있다.
◇ '전례 없는' 수요둔화…산유국 유가 전쟁 잠잠해도 회복세는 미지수
30일(현지시간) 뉴욕상업거래소(NYMEX)에서 5월 인도분 서부 텍사스산 원유(WTI)는 전 거래일보다 배럴당 6.6%(1.42달러) 미끄러진 20.09달러에 마감했다. 이는 2002년 2월 이후 약 18년 만에 최저 수준이다. WTI는 이날 장중 19.27달러까지 하락하면서 20달러 선이 무너지기도 했다. 런던 ICE 선물거래소의 5월물 브렌트유 역시 배럴당 8.70%(2.17달러) 폭락한 22.76달러를 기록했다.
국제유가의 폭락세는 사우디와 러시아 간의 갈등에서 시작됐다.
사우디는 OPEC+(석유수출국기구(OPEC)과 10개 주요 산유국의 연대체)의 감산 합의가 지난 3년간 유지되면서 원유 수출량을 하루 700만 배럴 초반대까지 낮췄으나 3월 31일로 감산 기한이 끝나면서 4월부터 1000만 배럴로 수출량을 높일 방침이다. 더 나아가 사우디는 5월부터 하루 원유 수출량을 사상 최대규모인 160만 배럴로 올리겠다고 밝혔다.
러시아도 당장 다음달부터 증산을 예고한 상태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전화 통화를 통해 국제 유가 안정 방안을 논의했지만, 유가 하락세를 진정시킬 수 있을지는 불확실해 보인다.
유가 폭락이 산유국들의 갈등에서 촉발되기는 했지만, 근본적으로는 글로벌 경기의 가파른 침체를 반영한다는 점에서 시장 불안의 뇌관으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 IHS마킷의 다니엘 예긴 부회장은 "현재 원유시장은 OPEC+ 산유국 갈등과 수요둔화라는 이중고에 직면하고 있지만 유가 전쟁은 일부에 불과하다"며 "큰 그림은 코로나발 경기침체"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자동차는 도로 위에 달리지 않고 비행기는 하늘에서 보이지 않다. 공장 가동률은 하락하고 있고 사람들은 일을 하기 위해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며 "이러한 현상은 4월까지 이어지면서 하루 2000만 배럴어치의 수요가 위축될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4월 12일 부활절까지 미국의 경제활동을 정상화하겠다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역시 이같은 위기감을 반영하듯 사회적 거리두기 등의 가이드라인을 4월 말까지 연장한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면서 예긴 부회장은 "이러한 수요침체는 전례 없는 수준이다"며 "과거 2008년 금융위기보다 6배 더 큰 규모이다"고 강조했다. OPEC에 따르면 작년 글로벌 원유수요가 하루 9967만 배럴로 추산됐다.
투자은행 골드만삭스는 코로나19 사태가 원유시장을 좌우할 수 있는 게임 체인저가 될 수 있다고 진단하며 "코로나19 사태는 일생의 가장 큰 경제쇼크인건 맞지만 원유를 필수재료로 하는 사회적 상호작용과 세계화를 통제하는 것이 바이러스의 주요 방어책이다"고 설명했다.
은행은 이어 "코로나19에 따른 경제적 영향은 유가에 매우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것으로 믿는다"며 "원유는 다른 원자재들과 달리 파이프라인, 선박, 수출터미널, 재고시설, 정유소 등과 같은 인프라에 저장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시설들의 저장한도에는 한계가 있다"고 강조했다. 예긴 부회장도 "원유를 어디에 쌓아야 할지가 현재 관심거리다"며 "저장소가 고갈되면 유가가 더 떨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골드만삭스는 "현 시점에서 나올 만한 질문은 ‘미국과 OPEC이 과연 시장을 살릴 수 있을까?’ 이지만 수요쇼크의 규모가 너무 크기 때문에 사우디와 러시아의 유가 전쟁이 원유시장과 연관이 없을 정도의 수준이라 해도 무방하다"고 주장했다.
골드만삭스는 또한 "원유시장의 안정화를 위해선 글로벌 수준의 조율된 감산합의가 필요하지만 잉여공급량이 넘치는걸 막기에는 너무 늦었다"며 "이번주 원유수요는 하루 2600만 배럴가량 떨어질 수도 있다"고 진단했다.
예긴 부회장 역시 유가전망에 대해 "4월은 매우 힘든 힘든 개월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30일(현지시간) 기준 미국 존스홉킨스대학에 따르면 글로벌 코로나19 확진자 수는 73만명에 육박했고 사망자 수는 약 3만4600명대로 집계됐다.
◇ 코로나발 저유가에 美 ‘세계 1위 산유량’ 위험
이렇듯 글로벌 원유시장에 대한 먹구름이 짙어질 것으로 전망되는 가운데 일각에서는 미국이 힘겹게 달성한 ‘세계 1위 산유국’이란 지위를 잃을 것이라는 시각이 제기됐다.
미국은 그동안의 ‘셰일 붐’으로 인해 지난 2018년 사우디와 러시아를 제치고 세계 1위 산유국으로 등극했지만 최근 저유가 현상이 지속되면서 미국의 산유량이 계속 줄어들 경우 ‘넘버 원’이라는 타이틀도 결국 실추될 것이란 주장이다.
두바이 최대은행 에미리트 NBD의 에드워드 벨 원자재 애널리스트에 따르면 미국의 대표적 채굴지역인 텍사스 퍼미안 분지에서만 59개의 굴착 장치들의 운행이 중단된 것으로 나타났다. 여기에 셰일 업계의 예산 삭감, 자금 조달 중단, 근로자 해고 등의 악재까지 겹치면서 2분기부터 미국의 산유량이 하루 75만 배럴가량 감소할 것이라는 분석이다.
벨 애널리스트는 "올해 미국이 해당 지위를 잃을 것이란 전망이 거의 확실하다"며 "예상했던 기간보다 더 빨라질 가능성도 있다"고 설명했다.
문제는 트럼프 행정부가 이에 대응할 수 있는 마땅한 수단이 없다는 것이다. 예긴 부회장은 "미국의 원유생산은 각 주(州)에 의해 통제되고 규제됨으로써 행정부는 외교 말고는 별 다른 선택지가 없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사우디와 러시아의 유가 전쟁 중재를 위한 미국의 노력은 현재까지 큰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이에 따라 미국은 산유량 감소라는 악재를 맞닥뜨릴 것으로 예상된다.
산유량 감소는 셰일 붐이 안겨준 미국의 정치적 영향력 측면에서도 악재다. 에너지안보는 국가안보와 직결되는 만큼 미국의 산유량 감소는 대외정책에도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예긴 부회장은 "현재 유가 수준을 고려하면 미국의 원유 생산량이 대폭 감축될 수 있다"며 "이는 단순 경제적 문제에 그치지 않고 에너지안보와 국가안보까지 위협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한 "이러한 현상이 지속될 경우 세계에 대한 미국의 역할과 입지가 작아질 수 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이와 관련, 미 경제매체 CNBC는 31일 "일부 에너지 전문가들은 세계 원유저장 시설이 부족할 것으로 보임에 따라 국제유가가 배럴당 10달러선은 물론 한 자리 수까지 내려올 수 있다고 내다보고 있다"고 전했다. 그만큼 미국의 셰일 업계가 난관에 봉착했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에너지경제신문 박성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