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E칼럼] 민주적 개인주의 vs 독재적 전체주의

에너지경제신문 입력 2020.08.12 07:04

이호영 서강대 종교연구소 연구원


"한국은 개인의 자유를 억압한다."

이는 코로나19로 휴대폰 동선추적과 관련한 미국과 유럽의 반응이다. 자기들은 도시를 봉쇄해 이동의 자유를 속박하면서 한국을 비난한다. 이 비판을 기화로 서양은 개인주의이고 동양은 공동체주의라서 방역을 잘한다는 주장까지 나돌았다. 어디가 끝일지 모를 헛소리다. 모든 인권과 자유는 개인에서 시작한다. 개인 없는 공동체의 이익이란 집단주의이며 독재일 뿐이다. 우리는 ‘개인’이 없는 중국이나 북한이 아니기에 봉쇄도 하지 않는다.

우린 독재의 질곡을 건너 주체적으로 자유를 획득했다. 자유의 의미를 짙게 체감하기에 독재가 주입하려는 가치가 허망하다는 것을 안다. 유럽과 미국은 자유주의 종주국이다. 하지만 쾌쾌묵은 구식이다. 1215년 영국 마그나카르타는 800년 묵었고, 1789년 프랑스 혁명에서 250년이고 68혁명도 50년이다. 2016년 촛불생인 우리보다 늙었다. 낡은 자유가 새 자유를 이해 못해서 하는 꼰데 짓이니 아량을 가지고 이해하자.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 양주(楊朱)라는 위대한 개인주의 사상가가 있었다. 그는 "내 다리털 하나를 뽑아 천하가 안정되더라도 뽑지 않겠다"하여 이기주의 또는 쾌락주의로 악명 높았다. 공맹(孔孟)이라 할 때 그 맹자가 양주에게 이를 갈았기에 가짜뉴스를 만들어 퍼트렸다.

맹자는 양주를 "자기만을 위하고 군주를 인정하지 않는다. 군주를 인정하지 않으니 짐승이나 마찬가지이다"라며 반사회적 아나키스트이자 이기주의자라 비판한다. 맹자의 비난을 분석하면, 양주는 유가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덕목인 국가의 군주에 대한 충성(尊尊)을 부정했다. 맹자의 입장에서 군주의 부정은 국가공동체의 부정이자 기본 질서에 대한 부정이다.

유교가 지배하는 한 우리에게 군주나 집단만 있고 개인은 없다. 현제 중국도 그렇다. 개인이 없으니 인권이 없고, 개인이 없으니 자유와 민주도 없는 건 당연하다. 공자는 옛 학자는 자기를 위하고, 요즘 학자는 남을 위한다고 하였다. 공자는 적어도 집단주의의 신분질서에 잡힌 꼴통 맹자보다는 나은 인물이었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이기적인 자기가족 돌보기는 유전자 차원에서 설계된 것이라는 리쳐드 도킨스(R. Dawkins)의 말을 빌지 않더라도, 우리가 생존하는 이유는 우리가 이기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기주의는 모든 동물에 거의 공통된 자기보존본능의 생생한 표현이다.

이기주의는 18세기에 등장하기 시작한 개인주의적인 사상의 일종으로, 개인의 이익이 최대화하는 행동을 올바름의 기준으로 삼는다. 개인주의(이기주의 포함)에서 권리와 인권, 자유 그리고 민주와 자본주의가 나왔다. 따라서 우리가 공식으로 외우듯 이기주의와 개인주의의 반대말은 절대 이타주의가 아니다.

개인주의의 진정한 적은 일제(日帝)가 만든 강박적 민족주의와 박정희 독재 정권이 주입한반공적 민족주의다. 이 둘은 일제 군국주의가 세뇌한 ‘집단주의’를 뿌리로 삼는다. 따라서 우리가 거부해야 할 대상은 개인주의가 아니라 일제 군국주의자들 발명품인 동양적 ‘전체주의’이다. 반대로 인간이 지닌 자연스러운 생존에 대한 의지인 ‘이기’와 도덕적인 주체로서의 ‘개인’은 우리가 추구해야 할 최고의 가치이다.

한국의 새로운 민주주의에서, 우리는 강제에 못 이겨 마스크를 쓰는 게 아니다. 문재인 정부는 시진핑 중공도 아니고 김정은 북한도 아니다. 우리가 마스크를 쓰고 사회적 거리를 유지하며 동선추적에 동의하는 건 우리가 보편적 이성을 지닌 국제 시민이고 개인의 양심과 판단에 따라 행동해서다. 현재의 새로운 민주주의를 일궈낸 한국인은 주체적으로 자신과 타인의 권리를 인정할 줄 아는 합리적인 개인이라서 더욱 자발적이고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마스크와 동선추적 허용이 이기적이고 개인적인 이익에 더 적합해서다.

이기적이고 개인적이라면 곱게 보지 않는다. 이는 독재 지지자들이 ‘전체주의’ 사회와 대비하여 ‘개인주의’를 부정적으로 날조해서 생긴 현상이다. 개인주의를 부정적으로 대하는 건 ‘집단’을 위해 ‘개인’을 제거하려는 전체주의의 세뇌일 뿐이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개인과 집단의 대비하는 현상에 가슴이 쿵하고 내려앉았다.

우리는 어느 경우에도 개인적 자유를 양보할 수 없다. 다시는 결코 박정희 전두환 같은 권위적인 집단주의 독재로 돌아갈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각자 개인의 자유의지로 마스크를 선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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