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E칼럼] 에너지 전환은 구호와 결심으로 되지 않는다

에너지경제신문 입력 2018.07.23 09:47

정범진 경희대 원자력공학과 교수


연일 불볕더위이다. 가마솥이라고 하는 표현이 딱 맞는다.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냉방기 없이 견디기가 어렵다. 냉방온도가 제한되는 사무실에서 근무하다가 보면 내가 일을 하는 대가로 급여를 받는 것인지 아니면 고통을 당하는 대가로 급여를 받는 것인지 헷갈릴 지경이다. 정신이 혼미해져서 근무의 효율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을 생각하면 과연 무엇을 위한 냉방온도 제한인지 모르겠다. 전기가 어떤 일을 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인데 전기절약을 위해 일의 효율과 건강을 희생하는 것이 과연 본말이 전도된 것은 아닌가?

냉방온도 제한으로 절약하는 금액이 냉커피 한잔의 가격보다 적다면 과연 우리는 냉방온도 제한을 택해야 할까 냉커피를 포기해야 할까? 우리 사회는 합리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것일까?

전력수급계획을 수립할 때 첫 단계는 미래의 전력수요를 예측하는 것이다. 두 번째 단계는 얼마나 전력을 아낄 수 있는지 수요관리 목표를 설정하는 것이다. 제8차 전력수급계획에서는 정치적 영향으로 전력수요는 낮게 예측했고 수요관리 목표는 높게 설정했다는 것이 중론이다. 그렇게 계획을 수립할 수 있다. 그런데 그게 맞기는 어려울 것이다.

또 과잉설비가 가져올 사회적 손실과 과소설비로 인하여 정전이 가져올 사회적 손실을 비교하면 후자가 훨씬 크다는 것이 정설이다. 특히 사회가 전산화되고 정보화되고 고도산업이 발전하면 더욱 그렇다. 절약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축구는 팀의 구성과 준비상태 그리고 감독의 용병술에 의해서 승패는 결정이 된 것이고 경기는 단순히 이러한 것을 확인하는 과정일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가끔 의외의 결과가 나오기도 하지만 초등학교 축구팀이 대학교 축구팀을 이길 수는 없다. 물론 그래도 가끔 의외의 결과가 나오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의외에 기대를 거는 방식으로 국가계획을 수립하지는 말아야 한다. 전력수급계획의 전력수요를 상식이하로 줄여놓고서, 잘하면 정전이 나지 않을 수도 있다고 기대하는 것은 벌써 실패이다.

요즘 과학기술은 구호가 너무 판을 친다. 석탄을 이용한 증기기관으로 산업혁명이 일어났을 때 누구도 그 때를 산업혁명이라고 부르지 않았을 것이다. 나중에 보니 그 때가 산업혁명의 시기였던 것일 것이다. 산업혁명하자고 해서 산업혁명이 된 것이 아니라 증기기관이라는 기술이 개발되고 이것이 노동력을 대치할 만큼 가격이 낮아진 결과일 것이다. 그런데 요즘 제4차 산업혁명과 같은 과학기술은 구호가 선도한다. 물론 그럴 필요성을 전면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미래를 예측하고 필요하고 가능한 일이라면 아직 기미가 보이지 않더라도 정부가 선도하고 투자함으로써 다른 나라와의 경쟁에서 앞서게 할 필요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도 정신을 잘 차리고 할 일이다. 무조건 선동적으로 할 일은 아니다.

에너지 전환도 마찬가지이다. 재생에너지 기술이 발전돼 보조금을 주지 않아도 되고 다른 발전원의 경제성을 압도하게 되면 이는 하지 말자고 해도 될 일이다. 선동과 구호로 될 일이 아니다.

에너지 전환이 대세라거나 세계적인 추세라는 말도 곤란한 얘기다. 국가별로 가진 자원과 기술 그리고 환경여건이 다르기 때문에 어떤 나라에서 재생에너지발전이 그리드 패리티에 도달하였다고 하여도 그건 그 나라의 얘기지 우리나라에 적용되는 얘기가 아니다. 어디서 우리 경우에 맞지 않는 사례를 들고 와서 우리도 해야 한다고 하다가 보면 뱁새가 될 확률이 높다.

지인이 보험가입을 권유하면 들어주기보다 지인이 이로 인해 얻게 될 인센티브를 그냥 드리는 것이 더 현명할 수도 있다. 재생에너지 개발을 국내개발보다 수입제품을 설치하는 방식으로 늘려나간다면 이 또한 남 좋은 일 할 것이 아니라 이문을 그냥 개발업자에게 주는 것이 더 경제적일 수도 있다.

이 더위를 지내며 우리가 과연 구호와 선동에 합리성을 잃고 있는 것이 아닌지 한 번쯤 생각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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