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국 전 중국 시안 주재 총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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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국 전 중국 시안 주재 총영사 |
트럼프 정부 이래 중국을 전방위적으로 견제하기 위해 추진돼 온 미국의 공급망 분리 중심 디커플링(decoupling·탈동조화) 정책이 지난 5월 히로시마 G7 정상회의를 계기로 디리스킹(de-risking·위험제거) 정책으로 바뀌고 있다. 디리스킹은 중국과 완전히 결별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 리스크를 관리해나가자는 취지로 제안된 개념이다. 바이든 대통령의 ‘책사’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디커플링이 아닌 디리스킹과 다양화를 추구하고 무역을 차단하지 않는다면서 디리스킹의 주요 대상으로 첨단 반도체와 배터리를 언급했다. 미국 정부가 첨단 산업분야 등에서 중국을 완전 배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잘 알기 때문에 물밑에서는 협상의 손을 내밀며 ‘중국 달래기’에 나서고 있다는 분석이다.
최근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에 이어 재닛 옐런 재무장관 등 미국의 장관급 인사들이 연이어 중국을 방문해 디리스킹을 강조하고 있다. 옐런 재무장관은 방중 일정을 마무리하며 가진 기자회견에서 "중국과의 디커플링을 추진하지 않는다"고 단언하고 "디커플링은 양국에 재앙이 될 것이며 세계를 불안정하게 만들고 실행할 수도 없다"고도 했다. 디리스킹으로 미중관계가 완화할 조짐을 보이자 일각에서는 수출 위주의 경제 구조를 갖고 있으면서 대중 경제의존도가 높은 한국이 중국에 강경한 모습을 보이는 데 대한 우려를 제기하고 있다. 만약 한중관계가 더 악화된다면 중국은 그간 한국에 대해 보복수단으로 써왔던 ‘수입 통제’가 아니라 반도체, 배터리 등 주력 수출산업에 필요한 핵심 광물의 ‘수출 통제’ 카드를 쓸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다. 나아가 중국이 전통적인 라이벌 국가인 일본에 대해서는 유화적인 제스처를 취하고 있지만 한국에는 상당히 냉담한 자세를 보이고 있는데, 중국과의 교역규모가 큰 한국이 디리스킹 상황에 따른 새로운 전략을 전개해야한다는 것이다.
윤석열 정부는 출범 이후 ‘안미경중(安美經中)’과 같은 모호한 정책으로는 험난한 국제 정세를 헤쳐 나갈 수가 없다는 인식 아래 한미동맹을 굳건히 하고 한일관계를 회복하는 데 힘을 쏟고 있다. 대중국관계에서 강한 버팀목이 없으면 상당히 어렵기 때문에 그 정책기조는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중국도 주변국이자 주요 교역대상국이므로 우호협력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양국 관계는 윤석열 대통령의 ‘대만해협 현상 변경 반대’ 언급과 싱하이밍 주한 중국대사의 ‘베팅’ 발언 논란으로 빚어진 경색국면이 좀처럼 호전의 기회를 잡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지난 14일 자카르타 아세안외교장관 회의에서 박진 외교부장관과 왕이 중국 중앙정치국 위원간 회담이 한중관계 발전의 모멘텀이 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친강 외교부장이 건강상의 이유로 이 회의에 참석하지 못하고 왕이 위원이 대신 참석하면서 박진-왕이 회담이 이루어졌는데 ‘전랑외교’의 대표격인 친강 부장 대신 한반도문제 등 국제정세 전반을 꿰뚫고 있는 왕이 위원과의 회담이 오히려 양국관계 발전에 긍정적인 의미가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특히 회담 개최 시점은 북한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화성-18형’ 2차 시험 발사 도발(12일) 직후였다. 양측은 건강하고 성숙한 한중관계를 만들어 가기 위해 세심한 주의와 노력을 기울여 나가기로 했고 북핵 문제와 관련해 각급에서 소통을 강화하자는 데 공감했다. 또 안정적인 공급망 관리, 인적교류 확대, 문화콘텐츠 교류 활성화 등 실질협력의 가시적인 성과를 달성하기 위해 적극 협력하기로 했다. 양측은 한일중 3국 협력 협의체의 재활성화를 위해서도 적극 노력하기로 했다.
한편으로 왕이 위원은 한국이 ‘하나의 중국’ 원칙을 준수하고 신중하고 적절하게 처리하기를 바란다고 했고, 박진 장관은 한국은 일관되게 하나의 중국 원칙을 존중해왔고 이 입장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고 말하면서 대만문제와 관련 갈등은 어느 정도 해소된 것으로 보인다. 이번 회담에서 눈 여겨 볼 대목은 중국이 "한국과 상호존중의 정신으로 협력하고 ‘화이부동(和而不同}’이라는 군자의 길을 추구하겠다"고 표명한 점이다. 사실, ‘화이부동’ 방식은 작년 8월 칭다오 한중 외교장관회담에서 박진 장관이 제안했는 데 이번에 왕이 위원이 화답함으로써 앞으로 새로운 한중관계 발전을 추진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키워드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