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문재인 전 대통령의 처신과 품격

에너지경제신문 입력 2023.09.24 13:50

구동본(정치경제부장/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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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동본

문재인 전 대통령의 정치 행보가 거침없다. 대통령 재임 시절보다 더 왕성하다. 정치 전면에 선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대통령 재임 중 "퇴임 후 잊혀진 삶을 살고 싶다"던 자신의 희망사항과는 전혀 딴판이다.

경남 양산 사저 인근에 개인 사비를 들여 ‘평산책방’을 열고 다큐멘터리 영화 ‘문재인입니다’를 개봉했다. 사사건건 정치적 목소리도 적극적으로 낸다. 육군사관학교 홍범도 장군 흉상 이전, 세계스카우트잼버리대회 파행 운영 등이 쟁점으로 떠오르자 이번에도 가만있지 않았다.

최근에도 문 전 대통령의 그런 두 일정이 눈길을 끌었다. 지난 19일 서울 여의도에서 열린 9.19 평양 공동선언 5주년 기념식을 찾았다. 퇴임 이후 첫 공식 행사 참석이다. 9.19 평양 공동선언의 핵심은 상대방을 겨냥한 군사적 적대행위를 모두 중지한다는 ‘9.19 군사합의’다.

문 전 대통령은 단식 도중 건강 악화로 서울 면목동 한 병원에 입원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도 같은 날 방문했다. 퇴임 후 경남 양산의 사저에 줄곧 머물러오다 모처럼 서울 방문하는 길에 두 일정을 하루에 모두 소화한 것이다.

문 전 대통령의 이 두 일정은 시기적으로 부적절했다. 공교롭게도 이날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북-러 정상회담을 가진 지 일주일 되는 날이었다. 또 이 대표의 단식 20일째이자 이 대표가 건강악화로 입원한 지 이틀째이고 법무부가 이 대표 체포동의안을 국회에 두 번째 제출한 날이기도 했다.

김정은과 푸틴은 북-러 정상회담에서 양국의 무기거래와 군사협력 등 내용에 합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수시로 미사일을 펑펑 쏘며 도발을 서슴지 않아 한반도의 안보 불안을 야기하고 있는 김정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침공으로 국제사회 비난과 규탄의 대상인 푸틴이 손잡은 것이다. 남북 9.19 군사합의를 휴지조각으로 만들고 인류의 평화를 깨뜨린 장본인들이다.

문 전 대통령은 그런 김정은과 푸틴의 악수 장면을 목도하고 일주일 뒤 9.19 군사합의 기념식에 직접 참석했다. 문 전 대통령은 그 자리에서 최근 폐기 논란이 일고 있는 9.19 군사합의를 ‘최후의 안전핀’이라고 주장했다. 또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으로 이어진 진보정부에서 안보 성적도, 경제 성적도 월등히 좋았다"며 ‘안보는 보수정부가 잘한다’ ‘경제는 보수정부가 낫다’는 ‘조작된 신화’라고 꼬집었다.

문 전 대통령이 자신의 재임 당시 이룬 남북 평화 및 화해 성과를 5년 만에 기념하고 자축하는 것을 문제 삼는 게 아니다. 시기가 부적절했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짝사랑도 때가 있고 원칙이 있는 법이다. 우리의 안보와 국제사회의 평화를 위협할 수 있는 북-러 정상회담 직후라면 전직 대통령의 처신은 신중했어야 했다. 당초 잡힌 일정이라도 취소하는 게 옳았다. 굳이 기념하고자 했다면 영상축사 또는 축전으로 대체하는 것도 방법이었을 것이다.

문 전 대통령의 이 대표 단식 병원 방문도 논란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그 자리에서 "빨리 기운 차려서 다른 모습으로 다시 싸우는 게 필요한 시기인 것 같다"고 했다고 한다. 당시에도 이 대표 단식 진정성 및 체포안 처리방향에 대한 당 안팎의 논란이 한창일 때였다. 이 대표는 검찰로부터 소환수사 통보를 받은 상황에서 단식에 돌입했다.

단식의 명분도 납득하기 어려웠다. 원내 권력을 장악한 거대 정당의 대표가 극단적인 투쟁 방식의 단식을 선택한 것도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민주당은 국회 재적의원 298석 중 과반을 훨씬 넘긴 168석을 차지하고 있다. 단식 말고도 윤석열 정부의 잘못된 국정을 얼마든지 견제하고 바로잡을 수단을 가졌다.

실제로 민주당은 그간 우리 헌정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국회에서 막강한 거대 야당의 힘을 유감없이 행사했다. 입법을 통해 윤석열 정부의 조직 또는 정책·예산 운영 등을 제한했다. 국무위원 탄핵안 또는 해임안을 잇따라 가결했다. 걸핏하면 특검 도입 및 국정조사·청문회 실시를 위협하기도 했다.

이 대표가 "사즉생의 각오로 민주주의 파괴를 막아내겠다"며 무기한 단식을 선언했다. 하지만 냉정하게 보자. 윤석열 정권이 진정으로 민주주의를 파괴했다면 국회를 장악한 민주당이 탄핵 등의 방식으로 대통령을 몰아낼 수 있다. 우리 국회는 이미 현 민주당보다 적은 야당 의석으로도 대통령 탄핵안을 가결한 적이 두 번이나 있다. 설령 국회가 다수 의석을 차지한 야당 주도로 민주주의를 파괴한 대통령을 탄핵하지 못하면 대선이든 총선이든 선거로 해당 정권을 심판할 수 있다.

그런 절차가 민주주의를 지키는 것이고 그 절차를 따르지 않는 것이야말로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것이다. 개명천지 야당 주도의 국회에서 그 야당 대표의 단식을 야당 지지자 말고 민주주의 수호 투쟁이라고 누가 인식하겠는가.

이 대표는 여러 차례 불체포 특권 포기를 공언하고 검찰 수사나 있을 수 있는 법원 구속영장 실질심사에도 당당하게 나서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면서도 단식 중 검찰의 소환수사 관련 출석날짜를 편의적으로 바꿔달라고 요청했고 나아가 단식에 따른 건강악화 속도조절을 의심하게 하는 정황들도 솔직히 엿보였다.

결국 이 대표의 체포안은 지난 21일 국회 본회의에서 가결됐다. 민주당 내 40표 가까운 이탈표가 발생했다. 이 대표는 정치적 치명상을 입었고 구속의 기로에 섰다. ‘방탄’ 논란으로 시끄러웠던 단식도 급기야 24일째를 맞은 지난 23일 중단했다.

문 전 대통령은 그런 이 대표를 찾아 단식 중단을 설득했다. 목숨을 걸고 하는 단식을 멈추도록 권유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행보이고 인간적인 도리이다. 윤석열 대통령 취임 1주년인 지난 5월 10일 이 대표가 문 전 대통령의 평산책방을 방문한 것에 대한 답방일 수 있다.

국민감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본인의 필요와 의지만 중요하다고 보는 정무적 감각을 탓 하는 것이다.

이 대표 단식의 성격은 다소 달랐다. 단식의 주체가 제1야당 대표이기 전에 10가지 안팎의 중대 혐의를 받는 피의자다. 그 단식 자체도 이미 첨예한 진영대결의 대상이자 현장이 됐었다.

문 전 대통령이 그런 단식을 아무리 만류한 것이라 할지라도 이 대표 단식 병원을 직접 찾은 것은 스스로 진영싸움의 전사(戰士) 참전을 밝힌 것이나 다름없다. 전직 대통령이 정치의 한복판에 섰다는 뜻이다.

문 전 대통령은 이 대표의 단식 이틀째인 지난 1일 이 대표에 격려 전화도 했다고 한다. 문 전 대통령은 4~5분 가량 이어진 통화에서 이 대표에 "걱정이 되기도 하고 마음으로 응원을 보내고 싶어 전화를 드렸다"며 "윤석열 정부의 폭주가 너무 심해 제1야당 대표가 단식하는 상황이 염려스럽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문 전 대통령은 이 대표와 함께 윤석열 정부에 정권을 넘겨 준 지난 대선 패배의 공동 책임자다. 그 책임의 멍에를 평생 지고 살 것까지는 없다. 그렇더라도 전직 대통령이라면 적어도 자중하고 염치 있는 모습을 보이는 게 마땅하다.

지미 카터(98) 전 미국 대통령은 퇴임 대통령의 교본이다. 무능한 대통령으로 평가받아 미국 정치에서 드물게 재임에 실패했지만 퇴임 후 존경받는 대통령으로 거듭났다.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뒤 미국의 땅콩 산지로 유명한 곳이자 자신이 나고 자랐던 고향 플레인스로 돌아갔다.

퇴임 이듬해인 1982년 비영리단체인 카터센터를 설립, 전 세계 저소득층을 위한 집짓기운동인 ‘해비타트’(habitat) 활동을 펼쳤다. 1차 북핵 위기가 발생한 1994년엔 평양을 방문, 김일성 주석과 담판을 통해 제네바합의의 물꼬를 텄다.

카터는 그 공로로 2002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백악관 생활을 경제적으로 이용하고 싶지 않다"며 미국 전직 대통령들이 해온 고액 강연이나 회고록 출간 등 경제활동도 거부했다.

문 전 대통령은 요즘 왜 그럴까. 현행 헌법상 전직 대통령의 대통령선거 도전은 불가능하다. 대통령 5년 단임제에 묶여 있어서다. 개헌의 단골메뉴인 대통령 중임제가 도입되지 않는 한 문 전 대통령이 다시 대통령직에 오를 수 없다.

그런데도 문 전 대통령의 최근 모습을 보면 다시 정치하려는 것 같다. 대선에 또 나가는 것만 정치하는 게 아니다. 내년 4월 국회의원 총선거를 앞두고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일 수 있다. 벌써부터 문 전 대통령이 친문재인 세력의 구심점으로 나섰다는 얘기들도 흘러나온다.

윤석열 정부의 문재인 정부 성과 ‘흠집 내기’나 ‘흔적 지우기’에 대한 반발일 수도 있다. 사실 문재인 정부에 대한 윤석열 정부의 ‘이념 공세’ 또는 ‘정책 뒤집기’가 지나친 측면도 없지 않아 보인다.

문 전 대통령의 최근 처신에 대한 비판이 그가 억울하더라도 참으라는 게 아니다. 시기와 형식을 가려서 대응하라는 것이다. 절제가 필요할 때다.

전직 대통령 본인이 아니더라도 문제가 있으면 나설 측근 참모들은 많지 않는가. 그런 충성스러운 참모들조차 없다면 본인의 덕이 부족한 점을 원망할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 전직 대통령들은 대체로 불행했다. 반면 문 전 대통령은 임기 말에도 40% 넘는 지지율을 보였다. 그래서일까. 문 전 대통령은 퇴임 후 역대 사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정치적 목소리를 많이 내고 있다. ‘잊혀진 삶’을 언급한 대통령 치고 너무 의외다. 막상 퇴임하니 잊혀지는 게 그리 두려웠는가.

그렇지 않다면 퇴임 또는 탄핵 후 수사를 받고 철창 신세 등을 면치 못했던 전직 대통령들의 어두운 그림자들이 떠올랐는가. 정권 재창출에 성공한 김대중·이명박 전 대통령 뿐만 아니라 실패한 김영삼·노무현·박근혜 전 대통령도 이렇지 않았다. 후임 대통령 시절 감옥을 가는 등 온갖 시련과 수모를 겪었어도 비교적 조용한 퇴임생활을 했다. 물론 일부 전직 대통령이야 그럴 수밖에 없었던 점도 있었겠지만.

안타깝게도 앞으로 우리나라에서 현직 대통령이 과거처럼 전직 대통령들을 초청해 오찬 또는 만찬을 함께 하며 자문하던 모습을 더 이상 보기 어렵게 된 것 같다.

현직 대통령의 전직 대통령 초청 오찬 또는 만찬은 국가 통합 및 화합의 필요성이 있을 때 협조를 당부하거나 국가적으로 어려운 상황에서 경험과 지혜를 얻는 자리였다. 문 전 대통령은 우리의 불행한 대통령 역사를 딛고 전직 대통령의 품격을 만들어갈 수 있도록 부디 자중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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