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한 불완전 도매경쟁, 한전이 단일 판매하는 소매체제로 경쟁 중단
"재생에너지 외 다른 발전사들의 발전·판매 겸업도 허용해야" 주장도
에너지요금 정상화 위해 정치 벗어난 독립적 규제위원회 설립 요구 거세
[에너지경제신문 전지성 기자] 한국전력공사의 적자 심화로 인해 전기요금 현실화에 대한 요구가 증대되면서 현 전기요금 결정방식의 변화 필요성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가 확산되고 있다. 윤석열 정부도 국정과제로 ‘에너지시장·요금 및 규제 거버넌스의 독립성·전문성 강화’, ‘경쟁과 시장원칙에 기반한 전력시장 구축’을 내세웠다.
현재 전기위원회 중심의 전력산업 규제체계는 독립적인 의사결정에 한계를 보이고 있다. 전기위원회가 산업부 내 행정조직으로 심의기구에 불과해 전기요금이 재무적 근거가 보다는 정책적, 정치적 판단에 의해 결정되는 실정이다.
이로 인해 한전이 빚을 내서 발전사들에 전기판매대금 가까스로 주고 있는 상황이다. 심지어 발전자회사에 대신 채권발행을 강요하는 상황으로까지 치닫고 있다.
이처럼 비전문적 의사결정으로 인한 전기요금의 왜곡은 비효율적인 에너지 소비를 초래하고, 기후위기대응과 탄소중립을 위한 친환경 에너지 기술의 시장진입도 저해하고 있다.
최근 들어 전통적인 전력분야 전문가들은 물론 탄소중립, 환경 전문가들도 전력 도·소매 시장 개방이 이 같은 문제해결의 출발점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전력시장 구조. 자료=전력거래소 |
◇기후위기 대응 위해서는 유연한 소매시장 형성 등 개혁 필요
김상협 탄소중립녹생성장위원회 위원장은 "최근 막을 내린 제28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8)에서 각국의 관계자들에게 기후위기 대응을 위해서는 한국도 탄소감축을 위한 에너지 시장을 형성하는 능력을 보여줘야 한다는 지적이 많았다"면서 "한국이 글로벌 중추국으로서 기후변화 대응을 선도하기 위해 에너지가격체계를 독립적으로 결정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기술적으로 재생에너지 원전, 수소를 균형 있게 끌어올려야 하고, 녹색기후기금 등 세계를 이끌어갈 혁신성을 확보하기에 지금의 경직된 독점 구조, 단기적 시야에서 접근하는 정치적 시스템은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효율적인 기후위기 대응을 위해서는 독립된 기관에서 종합적으로 정책을 총괄해 결정하는 것이 어떤 정부가 됐든 국정운영 부담도 덜고 국민 수용성도 확보해 탄소중립과 에너지수급안정이라는 핵심 정책 목표를 효율적으로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 우리나라의 에너지시장은 과도한 가격규제와 독점적 산업구조에 따른 신규사업자 진입제한 등으로 민간 주도의 시장형성이 어려운 상황이다. 이는 탄소중립을 위한 다양한 시도들을 막는 장벽으로 작용하고 있다.
낮은 에너지 요금구조(특히 전기요금)로 인해 에너지신산업이 활성화되기 어려운 구조적 취약성도 갖고 있다. 이러한 경직적 산업구조 및 가격왜곡으로 시장진입이 제한되고 신기술의 개발 도입과 새로운 시장창출의 기회도 제한적인 상황에 처해 있다.
2001년 전력시장 구조개편 이후 20년이 넘었지만 소매는 아직 닫혀 있다. 도매시장에서도 공급자는 전력거래소 내에서만 경쟁을 하고 그 비용 전체를 판매사업자인 한전에게 받는다. 지난해 기준 한전 영업비용 100조 가운데 90조 가량이 전력구입비용에 달해 재무악화로 이어지고 있다.
박종배 건국대 교수는 "유럽이나 미국의 경우는 공급자와 소비자간 계약을 하는 구조가 대부분이다. 유럽은 60~70% 이상이었다. 우리는 RE100을 포함해 신재생에너지 분야에서도 이런 상황이 거의 없다"며 "우리도 빨리 도·소매시장을 개혁해야 한다. 지금이 위기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전력산업 구조를 개혁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본다"고 말했다.
◇에너지업계·정치권 "발전사 판매 허용 필요"
시장 개편의 핵심은 재생에너지 사업자들과 같이 기존 대규모 발전사업자들에게도 전력판매 권한을 줘야 한다는 게 업계의 중론이다. 실제 발전사들에게 전기 판매 권한을 줘야 한다는 주장은 전문가들은 물론 정치권에서도 꾸준히 제기돼 왔다.
지난해 SMP상한제에 시달린 재생에너지사업자들과 민간 액화천연가스(LNG)발전사들은 물론 발전자회사들도 한전의 중간배당 요구, 불리한 정산조종계수 적용 등으로 불만이 쌓이고 있다. 자체적으로는 수익을 내고 있음에도 한전과 묶여 있다 보니 원치 않는 재무악화를 감내하는 상황이 갈수록 빈번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전력시장은 전기요금의 억제라는 목적에 상당 기간 왜곡돼 온 게 사실이다. 전문가들은 자유로운 가격입찰제 방식으로 개선해 전력사업자의 창의적인 경쟁력이 나타날 수 있도록 하되 발전설비·송전설비 등에 대한 자유로운 매각과 발전회사 간 M&A(인수합병) 등을 통해 전력산업의 역동성이 나타나야 자율성과 창의력을 향상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폐쇄적인 국내 전력시장의 경쟁을 촉진하기 위해 발전사업자들이 발전과 판매 겸업을 허용하는 전력 도·소매 시장 구조개편의 필요성도 제기된다.
옥기열 전력거래소 시장혁신처장은 "생산 유통 소비 전반에 대해 신사업에 대해서는 자유롭게 규제를 풀어줘야 한다"며 "그 기반에는 원가주의에 입각한 요금정책이 자리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옥 처장은 "현재 발전시장 경쟁은 한국전력공사 발전 자회사의 법적 분리와 민간발전사의 일부 진입에 불과하다"며 "여전한 불완전 도매경쟁, 한전이 단일 판매하는 소매체제로 경쟁이 중단됐다"고 지적했다.
이어 "국내 전력시장은 하루전시장으로만 구성돼 빈틈이 많다"며 "해외 전력시장의 경우에도 단기 선물상품 중심으로 3년을 초과하는 장기계약은 거의 없어 영국, 브라질 등은 시장실패를 보완하기 위해 정책적으로 초장기 중앙계약시장을 도입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양이원영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은 "옛날에는 100기가와트(GW) 정도의 발전소가 있으면 되는 정도여서 발전기 1대당 500MW에서 1GW 용량이기 때문에 전체 다 해봤자 100대를 넘어가지 않아 발전소를 운영하는 기업이 많을 필요가 없었고, 자연스럽게 정부 주도의 독점산업이 됐다"며 "재생에너지가 주가 되는 시장은 여러 시장 참여자들이 필요하고, 누구나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재생에너지로의 전환은 막을 수 없는 흐름이며 화석 연료와 원자력 중심의 전기 생산에서 신재생에너지로 전환을 하는 상황에서 시장 구조가 과거와는 달라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양이 의원은 "개인부터 협동조합 농부, 어부, 중견기업, 대기업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게 재생에너지 산업이기 때문에 수백만 개의 발전소로 늘어나게 되고, 그런 시장은 독점 구조로 살아남기는 어렵다"며 "현재 발전소는 민간이 이미 다같이 하고 있는데 판매 역시 한전뿐 아니라 다양한 전력 회사들이 생기는 게 더 좋다고 생각한다. 경쟁을 통해 더 싼 전기를 공급하고 소비자 선택권을 확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적절한 형태의 경쟁은 서로가 건강하게 긴장감도 가지고 효율적인 투자도 하게 만들 수 있다"고 역설했다.
김수이 홍익대 상경학부 교수도 "소매시장과 관련해서는 최근 직접 PPA(전력구매계약), 제3자 PPA가 도입돼 기업들은 재생에너지로 생산된 전기를 선택적으로 소비할 수 있게 됐다. 일반 소비자들도 재생에너지로 생산한 전기 등 비싸지만 환경적인 형태의 비용을 지불할 의향 있다고 하면 선택할 수 있는 다양한 요금제도가 도입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며 "또한 에너지 믹스가 지역별로 상이하므로 지역별로 소매요금을 다양하게 가져가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정치에서 벗어난 독립규제기관 설립이 첫 단계
전문가들은 소매시장 개방의 첫 단계로 연료비 연동제를 비롯한 원가주의 이행을 강화하고, 전기요금 규제의 독립성을 확보하고 에너지전환에 적합한 새로운 규제체계를 수립하기 위한 독립규제기관이 설립돼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우리나라의 전기요금 산정 구조. |
조성봉 숭실대 경제학과 교수는 "전기요금은 ‘물가안정에 관한 법률’에 따라 공공요금으로 분류돼 규제의 대상이다. 원칙은 총괄원가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정치권과 정부의 물가규제 차원에서 이뤄지고 있는 게 현실"이라며 "이런 문제점을 인식해 독립규제기관에서 투명하고 전문적으로, 또 독립적으로 요금을 결정해 사업자의 부실을 막고 지나치게 높은 요금도 막아 소비자를 보호하는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 전기요금에 대한 우려는 이해하나 올바른 규제를 위해선 현재와 같이 대통령이 사실상 정치적으로 결정하는 구조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지적했다.
실제 미국, 영국, 프랑스, 일본 등 해외 선진국들은 정치권과 분리된 독립적인 에너지시장, 요금 규제기관이 운영되고 있다. 위원들도 각 분야 (전력/가스 산업, 경제학, 소비자 정책, 재무 및 투자 등)에서 상당한 경험을 보유한 인력에서 선발하고 있다.
▲유승훈 서울과학기술대 교수가 제안한 독립 에너지규제위원회 설립(안) |
유승훈 서울과학기술대 교수(전기위원회 위원)는 "지금 전기요금 관련 규제기관인 전기위원회는 당정에서 결정해오면 의결만 하는 기구 역할에 불과하다. 위원 외에 사무국 직원이 5∼6명이 불과해 사실상 심도 있는 조사와 심의가 불가능하다"며 "다른 선진국들은 1000명이 넘는 직원들이 상시적으로 시장 감시와 정책 심의를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유 교수는 "미국, 영국, 일본, 프랑스, 독일 등 선진국은 모두 독립 위원회가 존재한다. 그런데 우리는 산업부 산하 한전, 전력거래소가 선수와 심판을 겸업하는 기형적 구조"라며 "독립적 에너지규제위원회 설립에 가장 큰 장애물은 기재부가 요금결정 권한을 포기하지 않으려 한다는 점이다. 산업부도 마찬가지다. 결국 공무원 수용성과 명분이 중요하다. 최근 한전 적자 문제 심화하면서 국회 등 중심으로 에너지시장 규제 개혁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다만 지금처럼 산업부 안에 있으면 독립성 없는 ‘옥상옥’(屋上屋)에 그칠 수 있다. 국무총리실 산하로 위원 전원을 차관급으로 임명해 독립성을 보장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아니면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방송통신위원회, 금융위원회-금융감독원 모델도 참고할 만하다"고 덧붙였다.
jjs@ekn.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