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 선거철 불어오는 '북풍'에 민심 왜곡 우려

에너지경제신문 입력 2024.01.16 15:20

오세영 정치경제부 기자

오세영 기자수첩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행할 것이오. 오늘의 위기만을 생각하며 나라의 장래를 포기할 순 없소."

사극의 인기를 다시 부활시킨 드라마 <고려거란전쟁> 속 고려의 왕 현종은 몽진 이후 조정에 복귀한 뒤 거란의 재침략에도 대비해야 하지만 고려의 결집력을 약하게 만든 지방호족 체제부터 개혁해야 한다며 이 같이 주장한다. ‘전쟁 대비를 먼저 한 뒤 지방개혁을 해야 한다’는 강감찬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어느 때보다 강하게 밀어붙인다. 무력 차원에서의 전란대비도 중요하지만 위기 상황에서 민심을 하나로 모아 국력을 키우려면 썩은 고름을 도려내야 한다는 말이다.

선거철만 되면 ‘북풍’이 분다. 올해 4월 10일 치러지는 22대 국회의원 총선거를 앞두고 벌써 한반도에 불안감이 찾아오고 있다. 지난해 연말부터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내년 초 남한에 큰 파장을 일으킬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라’는 지시를 내렸다는 내용이 국정원을 통해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 불안감이 식기도 전에 북한은 중거리탄도미사일 1발을 발사했다.

여기에 더해 최선희 북한 외무상이 지난 2022년 임명 이후 첫 단독 해외 방문으로 러시아를 찾았다. 러시아 크렘린궁은 조만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방북이 이뤄질 수 있다고 밝혔다. 북한이 러시아와 중국 등 주변국 외교 연대를 강화하면서 투트랙으로 무력시위를 이어가자 한반도에 긴장감이 높아지고 있다는 기사들과 ‘한반도 상황이 6·25 전쟁 직전만큼이나 위험하다’는 전문가 의견들이 줄곧 나오고 있다.

거대 양당들도 서로를 손가락질 하기 바빠졌다. 집권 국민의힘은 "북한이 노골적으로 총선 개입 의지를 표명한 만큼 더불어민주당도 더 이상 경솔한 말과 행동으로 북한에 잘못된 신호를 보내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했다. 반면 민주당은 "공포 분위기 조성용 전쟁 위기 유발, 윤석열 정권이 혹시 저지를지 모르는 북풍 유혹 경계하자고 말한 지 2주만에 국정원발 보도가 나왔다. 북한이 도발해주길 바라고 있나, 총선용 제 2의 총풍 사건 그립나"라고 지적했다.

‘북한이 선거철을 앞두고 군사 도발이나 무력충돌을 감행할 수 있다’는 주장에 근거가 되는 현상들은 과거에도 있었다. 실제로 정부 당국은 1992년 강원 철원 무장공비 침투사건 △1997년 부부간첩 사건 △2010년 천안함 폭침 등을 ‘대남 선거개입 목적의 무력 도발 사례’로 언급한다. 하지만 모든 사례들이 실제 선거와 연관이 있는 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즉 진짜 ‘북풍’이 불었는지 아니면 ‘북풍몰이’에 엮인 건지 헷갈릴 지경이다. 실제로 1997년 보수진영에서 북한에 대놓고 위장 총격을 부탁한 ‘총풍 사건’은 남북이 선거판을 흔들기 위해 함께 공작한 흑역사로 꼽히기도 한다.

최근 대만 국민들은 ‘선거에 임하는 자세’의 정석을 보여줬다. 올해 예정된 전 세계 대선 가운데 가장 처음 열린 대만 총통 선거에서는 반중(反中)·친미(親美) 정책을 펼쳐왔던 독립 성향의 라이칭더 민진당 후보가 당선됐다. 대만 대선은 시진핑 중국 정권의 "(반중 성향인) 라이칭더 후보가 당선되면 전쟁이 날 수도 있다"는 공개 협박 속에서 실시됐다. 대만 국민들은 전쟁 불안함 속에서도 그들이 생각하는 민주주의를 실현할 후보자에게 한 표를 던졌다.

국방력과 군사력, 놓칠 수 없는 주권의 핵심인 건 맞다. 하지만 단순히 정말 전쟁 준비를 해야 한다면 그건 그것대로 대비하면 된다. 전쟁이 나지 않는다고 준비 없이 방심하는 자세는 게으름과 무책임이다. 반대로 전쟁 불안감을 선거판에 이용하는 태도는 기만과 거짓선동이다. 유권자들이 ‘나라의 장래’를 생각하며 그 어떤 바람에도 흔들림 없는 선택을 하길 바란다.


claudia@ek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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