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정주 한국경제인협회 기업제도팀장
최근 경제계에서 보기 어려운 행사가 열렸다. 11월 21일 한국경제인협회와 삼성, SK, 현대차, LG 등 16개 주요 그룹들의 CEO들이 '한국경제 재도약을 위한 주요 기업 사장단 긴급 성명'을 발표한 것이다. 필자의 경험에 비추어 보면 기업과 경영자가 실명을 밝히면서까지 언론 앞에 나서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다. 아무리 필요한 일이라고 해도 자신이 종사하는 기업에 피해가 갈 우려가 있고, 정치권에서 한마디 한다면 이러한 행사에 참여한 개인들에게도 불이익이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걱정에도 주요 기업의 사장들이 공식적인 자리에 직접 얼굴을 보였다는 것은 지금의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말해준다. 2015년 메르스 사태 당시 기업인들이 경제위기 극복을 위해 나선 이후 9년 만의 일이다. 당시에는 국가 보건위기 상황이었지만, 지금은 특별한 위기 상황이 아님에도 기업의 CEO가 직접 나서는 행사가 열렸다는 것은 가볍게 받아들일 일이 아니다.긴급제언의 내용은 엄중한 경제상황, 위기에 직면한 산업에 대한 지원이 담겨있지만, 주된 내용은 역시 상법 개정안이었다. 사실상 모든 언론도 상법 개정안을 중심으로 기사를 다루었다. 그 만큼 기업에게는 중차대한 일인 것이다.
야당은 11월 14일 이정문 의원이 발의한 상법 개정안을 당론으로 채택했는데 그 내용은 이사의 충실의무 주주로 확대, 이사의 정당한 주주이익 보호 의무, 감사위원 분리선임 확대, 집중투표제 의무화 등 기존 경제계에서 반대하던 규정들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정치권에서는 경제계와 투자자 의견 수렴 등 절차를 거쳐 일사천리로 통과시킬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어 경제계로서는 위기감이 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다. 상법이 재계의 의견이 반영되지 않고 정치권을 통과한다면 투기 세력에 의한 경영권 공격, 이사에 대한 손해배상소송과 배임죄 고발 등 일상적인 경영활동이 어려워지고 신산업 투자나 사업재편을 위한 M&A는 사실상 불가능하게 된다.
이러한 경제계의 우려 때문인지 지배구조 규제를 강화하면서 보완방안으로 배임죄 개선이나 폐지, 경영권 방어수단 도입, 경영판단원칙 도입 등 도입하자는 주장이 있는데 이는 번지수를 잘못 찾은 것이다. 배임죄 폐지나 개선은 형법, 특경법, 상법 등에 규정된 배임죄 규정을 모두 정비해야 하고, 부작용 방지를 위한 방안까지 면밀히 검토해야 하므로 단시간에 가능한 작업이 아니다. 경영권방어수단은 그간 경영계에서 줄기차게 도입을 주장했지만 대기업 특혜 논란 때문에 번번이 좌절되었다. 경영판단의 원칙은 지금도 대법원에서 판례로 인정하고 있으나 엄격하게 적용하고 있어, 법제화한다고 지금보다 상황이 좋아지기 어렵다.
결론적으로 이러한 보완방안은 없는 것보다는 좋겠지만, 이사의 충실의무 확대와 같은 지배구조 규제 강화와 등가교환이 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지금 우리 경제는 커다란 변화의 순간에 서있다. 수출주도형 경제구조를 가진 대한민국은 자유무역의 혜택을 받아 국가 경제를 발전시켜 왔다. 그러나 보호무역주의가 세계적 트랜드로 자리잡게 되면 대한민국에게 커다란 시련이 닥칠 가능성이 있다.
이런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모두가 힘을 모아야 할 시기에 기업을 옥죄는 규제강화는 지양해야 한다. 만일 필요하다면 실질적으로 주주의 이익을 지킬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예를 들어 자본시장법상 합병 산정 방식의 개선, 물적분할한 회사 상장시 모회사 주주 보호 방안과 같이 실질적 개선방안을 찾는 것이 바람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