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원주 전 청와대 경제수석

▲박원주 전 청와대 경제수석
세계적인 파시즘 연구자인 로버트 팩스턴은 그의 2004년도 역작 '파시즘의 해부'에서 파시즘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정치적 행동의 한 형태로서 공동체가 겪고 있는 퇴행, 굴욕, (부당한) 피해 등에 대한 강박적 집착을 바탕으로 집단 행동, 세력, (집단적) 순수성 등을 과시하는 보상적 의식을 벌이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파시즘 체제 하에서는) 대놓고 폭력을 자행하기로 마음먹은 국가주의 무장세력 - 그 뿌리는 일반 대중 - 들이 전통적 엘리트들과 불편하면서도 효율적인 협력 관계를 통해, 민주적 자유(라는 명분)를 집어 치우고, 도덕이나 법적 제약 없이, 폭력을 주된 구제 수단으로 삼아, 공동체의 내부 청소(외국인 또는 반대 집단 제거)와 외적 확장(침략전쟁)을 꾀하게 된다.
사실 나치나 파시즘이라는 말은 오랫동안 반대 정파를 공격하기 위해서 공공연하게 쓰여왔던 비속어에 가깝다. 그래서, 파시즘을 정의한 팩스턴조차 특정 개인이나 정치적 조류, 특히 트럼프식 포퓰리즘에 대해, 파시즘이란 말을 쓰는 것을 극히 꺼려 왔다. 그러던 그가 마음을 바꾸게 된 계기는 2021년 1월 6일 흥분한 폭도들이 빨간색 MAGA (Make America Great Again) 구호가 쓰여진 야구 모자를 쓰고 미국 국회의사당에 난입했던 사건이었다. 1922년 로마 시내를 행진했던 무솔리니의 블랙셔츠나 1934년 좌파 정부의 취임을 가로막으려 난동을 부렸던 프랑스 극우세력들의 폭력 사태 등과 데자뷔가 느껴질 정도로 유사한 사건이었지만 팩스턴은 그보다는 트럼프가 공공연하게 시민들의 폭력을 부추기고 선거 결과를 뒤집으려 했던 부분을 더 주목했다. 그는 '트럼프가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었다'고 판단했고, 이후로 그는 트럼프가 파시스트라는 주장을 거두지 않고 있다.
민주적, 헌법적 절차 배제하는 정치 없어져야...
트럼프가 다시 대통령이 된 지금, 세계 최강의 군사, 경제 대국인 미국이 파시스트 국가가 된다는 것은 정말 큰 일이지만, 그보다 지난 수 개월 동안 우리나라에서 이와 매우 유사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는 점이 더 걱정스럽다. 지난 1월 19일 새벽, 내란혐의자인 대통령에 대한 구속영장 발부에 분노한 폭도들이 떼를 지어 서부지방법원을 습격하여 법원의 외벽을 파손하고 내부 기물을 부수는 기괴한 사건이 벌어졌다. 대한민국의 법 질서가 송두리째 부정당하는 황당한 일이었고, 태권도 발차기 품새로 현란하게 사무실 유리를 깨부수고 방화를 시도하는 폭도들의 모습이 실시간으로 생중계되면서 우리나라는 전 세계의 조롱거리가 되고 말았다.
이런 사태를 유발한 특정 정치인이 파시스트적 성향을 지니고 있는지, 아니면 단순히 의회로부터의 '자유'에 대한 열망이 과했던 것인지 여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민주적, 헌법적 절차를 통해 배제하면 그만이다. 그보다는 이러한 정치인들이 만들어지고 세를 과시할 수 있게 되는 사회가 더 큰 문제다. 민심의 저변을 오염시키고 있는 폭력과 불법, 전체주의적 정서를 어떻게 극복하여 피땀 흘려 일군 우리의 민주주의를 지켜낼 수 있는지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파시즘의 유혹에 빠진 나라들, 예컨데 독일, 이태리, 군국주의 일본 등 모두 종국에는 망했다. 국민들의 고통, 불만, 불안이 급격하게 확대되는 상황에서 자기 나라나 민족의 순수성을 강조하고 힘을 합쳐 위기를 극복하자고 하는 것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거기서 더 나아가 다양성을 거부하고, 개인의 자유와 권리, 법의 존엄성을 부정하며, 국가가 경제 전반을 통제하여 군수물자 생산에 열을 올리는 국가자본주의 단계에 이르게 되면, 북한의 독재정권과 마찬가지로, 세계를 상대로 싸우자고 덤비는 막장 국가로 전락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역사에 죄를 짓는 것이다.
비상한 사회현실도 제 역할 못한 우리 정치의 책임
지난 수년간 우리나라 정치, 경제 상황을 살펴보면 지금과 같은 비상한 사회적 흐름이 뜬금없이 만들어진 것은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다. 급격하게 진행된 고령화와 만성적 노동력 부족, 보호무역주의 조류 확대와 글로벌 기술분쟁 격화에 따른 시장 잠식, 내수 침체와 서민경제의 파탄, 과도한 규제로 인한 투자 위축과 일자리 소멸 등 관측할 수 있는 여러 경제 현상 속에서 우리 국민들의 삶이 얼마나 불안하고 피폐해졌는지 여실히 읽을 수 있다. 작년 대다수 대기업들이 신규채용에 나서지 못하고 일부 경력직 직원들을 채용하는데 그쳤다. 이제 막 사회로 나온 젊은이들에게 우리나라가 더 이상 기회의 땅이 아니게 된 것이다. 한국의 이대남들이 기성 세대에 치이고, 외국인 근로자에 치이고, 성별에 치여 숨쉴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을 비이성적이라고 웃어 넘기기에는 현실이 너무 심각하다. 그들이 느낄 불안과 분노에 정부나 정치권은 제대로 답해주지 못했다. 그래서 이젠 법치를 폭력으로, 합리를 격정으로 대체하는 도도한 악의 수레바퀴가 돌아가는 것을 대책없이 바라볼 수 밖에 없게 된 것이다.
나라가 이 지경이 되기까지 도대체 누가 무엇을 잘못한 것일까? 지금의 대통령과 여당이 이 모든 사회적 갈등과 불안을 만들었다고 말하면 간단해서 좋겠지만, 진실은 그렇지 않다. 파시즘은 이데올로기가 아니다. 누구든 대중선동의 깃발을 든 자가 승리해서 다른 이들을 정복하고 절대 권력을 행사하는 것으로 그 사명을 다한다. 파시즘은 정치가 국민들의 불안과 억울함을 대변하고 풀어주지 못할 때 집단적 정서불안을 모태로 태어나는 괴물이다. 아무리 신박한 논리 또는 궤변으로 치장을 해도 그 바탕은 기댈 곳 없는 대중들의 분노를 폭력적 수단으로 풀어내는 것에 불과하다. 그래서 상황이 이렇게 곪을 때까지 도그마와 정쟁에 빠져 현실을 외면했던 우리 정치는 책임을 면할 수 없다. 진작에 그들의 아픔을 이해하고 풀어주려 노력하는 정치가 있었다면, 국민들은 이를 지지하고 그 주장을 국정에 반영시키는 민주적 절차를 통해서 불안과 불만을 해소했을 것이다. 우리 정치가 그런 역할을 했는가? 그렇지 못했다. 그래서 지금의 우리 정치는 정말 무책임하고 정말 나쁘다.
진영간의 노선 논쟁으로 소외당한 국민들이 중도이다
이런 와중에 거대 야당에서 벌어지고 있는 노선 논쟁은 한가해 보이기까지 한다. 보수를 표방하는 여당이 법치와 민주주의의 파수꾼 역할을 손에서 놔버렸다는 비난을 받는 지금, 야당마저 국민들의 아픈 부분을 감싸주지 못하고, 질척거리는 자리와 차가운 자리를 피해서 앉겠다고 하는 모습이 얼마나 한심해 보이는지 그들은 아는 것일까? 지금 상황 그대로 야당이 정권을 잡는다고 해도 국민들의 불안의 불씨를 해소하지 못한다면 파국의 위험은 앞으로도 계속 커져 나갈 것이다. 이 지점에서 1960년 학생들과 시민들이 처절한 항쟁으로 이승만정권을 몰아내고 민주주의를 일으켜 세웠던 4.19혁명의 결실을 불과 11개월만에 군사정권에 고스란히 빼앗겼던 제2공화국 정부의 무능을 떠올리는 것이 지나친 비약일까?
여당과 야당이 우와 좌의 깃발을 들고 치열하게 싸우는 동안 이와 전혀 상관없는 대부분의 국민들은 '변방에 위치한' '중도'라는 격오지에서 외면당하며 지내왔다. 그 소외와 무시가 겹겹이 쌓여 폭동과 방화라는 듣도 보도 못한 현상까지 벌어지는 지금, 중도의 국민들에게도 관심을 가져달라는 요구가 그렇게 과한 것인가? 그럴 거라면 권력은 왜 탐하는 것인가? 지금 우리는 중요한 역사적 기로에 서 있다.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는지에 따라 우리 민주주의의 미래가 결정될 것이다. 인권과 법치가 사라진 범죄도시에서 가난의 멍에를 뒤집어쓰고 살 것인지, 아니면 우리 아이들에게 희망과 자부심이라는 이름의 미래를 물려줄 수 있을 것인지. 우리 정치 정신 좀 차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