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원주 칼럼]한국사회의 역동성을 지키기 위한 제언

에너지경제신문 입력 2025.05.18 10:28

박원주 전 청와대 경제수석

박원주

▲박원주 전 청와대 경제수석

2025년 4월 28일 현지 시간 낮 12시 33분경, 스페인에서 대규모 정전이 발생했다. 정전사태는 포르투갈 전역과 프랑스 남부 지역까지 확산되었고, 약 10시간 동안 전력 공급이 끊기면서 통신, 항공 및 교통망, 병원 등 대부분 공공 인프라의 작동이 마비되었다. 약 5,000만명 이상이 이 사태로 피해를 입었고 심지어는 사망자도 발생했다.




아직까지 정확한 원인은 밝혀지지 않고 있지만 사고 전후의 이상 현상들은 확인되고 있다. 정전 몇 분 전부터 송전망에 공급되는 전력량의 요동이 감지되었다. 풍력발전으로부터의 전력 공급이 순간적으로 급증했고, 프랑스가 스페인으로부터 전기를 공급받는 전력망이 자동적으로 끊겼다. 이 전력망 단절로 이베리아반도내 전력 수급 불균형이 더 악화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원전 몇기가 송전망 공급물량이 꽉 찼다는 시그널을 받고 자동적으로 운전정지에 들어갔다. 태양광 발전으로부터의 전력 공급도 18,000MW에서 순식간에 8,000MW로 급락하였다. 태양광 설비들을 자동적으로 셧다운하는 기능이 작동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재생에너지 전력 공급이 줄어드는 경우 수력발전 등을 통해 이를 보완하는 것이 보편적인데 이번 사태에서는 그런 기능도 한계에 부딪혔던 것 같다. 대량의 발전설비들이 그리드에서 이탈하면서 결국 유례가 없는 대규모 정전이 터지고 말았다.


스페인 정전 사태는 재생에너지 탓?



사건 이후 유럽의 많은 언론들, 특히 재생에너지에 대해 비판적인 언론사들이 정전 사태의 원인을 재생에너지로 지목했다. 심지어는 미국 에너지부의 크리스 라이트장관마저도 TV에 나와 재생에너지에 사고 책임을 돌리는 발언을 했다. 아직까지 원인 조사가 지속되고 있고, 벌어졌던 현상으로부터 볼 때 송전망 운영시스템이 적절하게 작동하지 못했던 것으로 읽히는데도 기다렸다는 듯이 재생에너지에 대한 거센 공격이 벌어진 것이다. 라이트 장관이야 원래 석유회사 출신이고 트럼프 행정부 자체가 친화석연료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는 만큼 그의 발언에 공감은 못하지만 그렇게 말한 심정이 이해는 된다. 그러나, 스페인을 비롯한 유럽 각국 정부에서도 이번 사태를 재생 에너지 탓으로 돌려서는 안된다는 점을 역설하고 있고, 이번 일을 계기로 21세기의 에너지 믹스에 걸맞는 송전망체계를 갖춰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미 세계적인 대세가 된 재생에너지의 확산이 이번 일로 주춤할 우려는 그다지 커 보이지 않는다.


이번 사태가 보여주는 더 우려스러운 시사점은 인류 사회가 새로운 혁신에 대해 대체로 부정적이라는 사실이다. 혁신의 도입이 문제를 일으키면 이를 해결하는데 힘을 모으는 것이 아니라 혁신을 거부하는 명분으로 삼는 경우가 더 많아 보인다. 그리고 지금까지 혁신을 거름삼아 성장해 왔던 우리나라가 특히 더 그런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다. 파괴적 혁신(Disruptive Innovation)은 1997년 미국 하버드대학 교수인 클레이튼 크리스텐슨이 소개한 개념이다. 기존 시장의 작은 틈새에서 열악한 기술로 출발한 시도가 빠르게 발전하여 기존 시장 점유자들을 몰아내고 새로운 시장지배자로 자리잡는 형태의 혁신을 의미한다.




그래서 더욱 필요한 파괴적 혁신


파괴적 혁신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초기 시장에서 소비자들의 인내와 포용이 필수적이다. 흔히 얼리어댑터로 불리우는 호사가들이 혁신의 초기 시장을 제공해 주면, 그 기반에서 제품과 서비스를 지속적으로 개선하여 궁극적으로 기존 시장을 대체하는 것이다.


초창기에 음질이 너무 나빠 알아들을 수도 없었다던 전화가, 대서양 너머까지 명확하게 메시지가 전달되는 전보를 이겨내고 통신 시장을 장악했던 것이나, 짧은 주행거리와 불편한 충전 인프라에도 불구하고 소비자들의 이타적 혹은 과시적 소비를 바탕으로 성능을 개선하고 점유율을 넓혀가고 있는 전기차, 저급한 기술이라고 퇴물 취급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중국 정부의 노골적인 비호하에 성능을 개선하고 시장 점유율을 늘려 지금 와서는 리튬이온 배터리의 아성을 함락시켜 버린 리튬인산철 배터리 등 성공적인 파괴적 혁신의 사례는 무수히 많다.


그리고, 자원도, 자본도, 인력도 빈약한 우리나라가 앞으로도 지속 성장을 유지하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 바로 이러한 파괴적 혁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혁신 환경은 우리 경쟁국들보다도 오히려 열악하다. 2017년 일본의 반도체부품 수출규제로 소부장분야의 경쟁력 확보가 절체절명의 과제가 되었을 때 가장 크게 문제 되었던 관행은 우리 기업들이 국내에서 개발된 새로운 소재나 부품의 사용을 꺼린다는 것이었다. 일본이 수출규제 대상으로 삼았던 고순도 불화수소의 경우, 이미 국내에 우리 기술로 제조할 수 있는 특허가 있는 상태였지만 반도체 업계는 신뢰성이 검증된 일본산 소재를 선호했고, 그 결과 공급망 충격을 피할 수 없었다.


새로운 혁신 시도는 매우 어려운 큰 모험이기에


지멘스 등 글로벌 업체들이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첨단 발전용 터빈이나 풍력발전 설비 등의 경우도 국내 기술로 제품이 개발돼도 이를 적용해주는 현장을 찾기 어려웠다. 이런 상황에서 발전 설비의 국산화는 매우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우리 시장 환경이 이처럼 글로벌 스탠다드 이상으로 파괴적 혁신에 대해 엄격한 것은 '실패하면 안 된다'는 문화적 성향에 뿌리를 두고 있다. 새로운 기술을 생산현장에 적용해서 실패하는 경우 이를 결정한 회사 임원은 그 책임을 피할 수 없다. 끊임없이 새로운 시도를 해야 먹고 살수 있는 나라에서 새로운 시도 자체가 생각하기 어려운 큰 모험이 되고 있는 것이다.


간단한 계산을 해보자. 1961년 우리나라의 신생아 수는 약 105만명으로 추산된다. 이들이 성장하여 한국의 경제 성장을 견인해 왔고 65세가 되는 올해부터는 공식적으로 경제활동 인구 통계에서 벗어나게 된다. 2012년 신생아 수는 48만 5천명이다. 이들이 실제 일을 시작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14세가 되는 올해부터 우리나라의 경제활동인구 통계에 새로 잡히게 된다. 단순 비교로 경제활동인구에서 빠지는 사람이 신규 진입하는 이들의 2배가 넘는다. 우리 경제가 지금의 성취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제 14세가 된 친구들이 65세가 될 때까지 지금 65세 연령층이 해왔던 일의 2배 이상 일을 해줘야 한다.


'혁신 장려하고, 실패 포용하는' 문화 만들어야


두 배의 노동을 한다는 것은 물리적으로도 불가능한 일이고, 그렇게 할 리도 없으니, 결국 2배 그 이상으로 창의적으로 새로운 부가가치를 만들어 내야 한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이들이 1961년생 선배들보다 2배나 더 혁신의 자질이 뛰어나기를 바랄 수도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지금 14세 연령층의 혁신성을 소중히 여기고 몇 번이고 도전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분위기를 만들어줘야 하는 것이다. 초고령화 시대에 접어들면서 국가공동체 쇠퇴의 위기를 맞고 있는 우리나라가 앞으로도 지속성장의 궤도에서 탈선하지 않으려면 혁신을 장려하고 실패를 포용하는 너그러운 문화를 만들어 가야 한다.


모두에 소개했던 정전사태로 돌아가서, 이번의 재앙을 재생에너지로부터 발을 빼는 기회로 활용하려는 근시안적인 행태가 벌어지지 않기를 바란다. 전력공급시스템의 총체적 붕괴라는 전대미문의 사태로 오히려 새로운 시대의 에너지믹스에 부합하는 최첨단의 송전 시스템 구축이 필요하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빈약한 재생 에너지 자원으로 간헐성 문제의 해결이 더 시급한 우리나라가 이러한 과제에 대한 해법을 제시할 수 있다면 K-Renewable이 우리의 새로운 미래 먹거리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제는 먼 과거의 이야기처럼 느껴지는 'Dynamic Korea'라는 구호를 되살리려면 우리는 혁신을 혁신하는 창의공동체로 거듭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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