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생부터 예견된 위기…한화·DL의 ‘ATM’으로 전락
손실·부채·신용 강등…끝 없는 재무 붕괴 연쇄 고리
25년 동업의 균열…‘책임 공방’ 속 꺼져가는 YNCC
3000억원 지원, 근본 해결 없는 위태로운 생명 연장

▲여천NCC. 사진=챗GPT
국내 석유화학산업이 구조적 위기에 직면했다. 정부는 지난달 20일 관계부처 합동으로 나프타 분해설비(NCC)의 연 270만~370만톤 감축을 축으로 한 구조조정의 큰 방향을 제시했다. 석화업계 10개사도 연내 자율구조 개편안을 제출하기로 했다. 에너지경제신문은 생존의 기로에 선 국내 석유화학산업의 위기 실태와 원인, 정부의 관련산업 정책 및 해법 시나리오·실행 트랙을 짚어본 뒤 주요 석유화학업체별 구조개편 선택지와 재무·고용 파급을 차례로 점검해 '누가, 무엇을, 언제' 바꿔야 하는 지를 입체적으로 조명해 본다. <편집자 주>
근본부터 불안…변동성 큰 시장 속 순수 NCC 사업 모델의 한계
1999년 10월, DL케미칼(당시 대림산업)과 한화솔루션(당시 한화석유화학)은 각자의 C4복합 공장과 BD 공장, 여천 나프타 분해 공장(NCC, Naphtha Cracking Center)을 통합해 50대 50 지분의 합작법인 '여천NCC(YNCC)'를 같은 해 12월 설립했다. 여천NCC는 연간 에틸렌 228만 톤, 프로필렌 128만 톤 등 석유화학 기초 원료 생산에만 집중하는 순수 NCC 사업자로 출범했다.
이러한 사업 모델은 본질적으로 취약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오직 업스트림(Up-stream) 부문에만 집중함으로써 여천NCC는 악명 높은 원자재 가격 변동 사이클에 완전히 노출됐다. 제품가에서 원료가를 뺀 에틸렌 스프레드가 낮고 수요가 부진한 시기에 충격을 흡수해 줄 다운스트림(Down-stream) 부문의 고마진 스페셜티 제품 포트폴리오가 부재했다.
호황기에는 수익성이 높았지만 이러한 구조는 과거 시대의 유물로서 새로운 시장 현실에 대응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1999년의 합작 결정은 당시 성장하는 시장에서 규모의 경제를 달성하기 위한 시대적 산물이었으나 전략적으로는 근시안적이었다. 이는 통합적이고 회복력 있는 화학 기업이 아닌 비용 중심의 범용 제품 생산자를 탄생시켰다. 여천NCC의 설계 자체가 미래의 취약성을 내포하고 있었던 셈이다.
손실→부채→신용 등급 강등…재무 붕괴의 연쇄 작용
여천NCC의 위기는 재무 성적표로 극명하게 드러난다. 지난 3년간 누적 적자는 8200억 원에 달했고 올해 8월에는 3100억 원 상당의 채무를 상환하지 못할 채무 불이행(디폴트) 위기에 직면했다.
각종 재무 지표는 급격히 악화다.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DART)에 따르면 부채 비율은 위험 수위인 200%를 훌쩍 넘어 올해 상반기 기준 338.04%까지 치솟았다. 이러한 심각한 재무 위기는 신용등급을 'A-'로 강등시키고 '부정적' 전망까지 달리게 해 회사채 발행을 통한 자금 조달 길을 사실상 막아버렸다.
신용 등급 강등의 결과는 즉각적이고 치명적이었다. 최근 1000억 원 규모의 회사채 발행 시도에서 무려 960억 원이 미매각되는 사태가 발생하며 발행 주관사가 이를 온전히 떠안아 시장의 신뢰가 완전히 상실되었음을 여실히 증명했다.
배당의 함정…한화솔루션·DL케미칼, 단기 이익을 위해 미래를 털어먹다
여천NCC 위기를 촉발시킨 근본 원인 중 하나는 고배당 성향이 꼽힌다. 회사는 2003년부터 2020년까지 벌어들인 이익의 대부분인 4조4300억 원을 모회사인 한화솔루션와 DL케미칼에 지급했다. 이는 지난 12년간 2조700억 원이 지급되었다는 초기 분석을 2배 이상인 규모다.
이러한 배당 정책은 지속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특히 2018년에는 당기순이익 대비 배당금 비율인 배당 성향이 162%에 달했는데 이는 한 해 벌어들인 순이익보다 더 많은 돈을 배당했다는 의미다. 이는 당시 한국 기업 평균 배당성향 약 27%와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이러한 공격적인 현금 유출 정책은 회사의 몰락을 직접적으로 초래했다. 이익잉여금을 미래 투자, 설비 현대화, 재무 완충 장치 마련에 사용하는 대신, 모회사의 단기 현금 수요를 위해 소진했다. 그 결과 2공장 증설 등에 투입된 1조562억 원의 막대한 자금 대부분을 외부 차입에 의존해야 했고, 이는 재무 구조를 치명적으로 약화시켰다. 2021년 말 여천NCC의 현금 및 현금성 자산은 8770만 원에 불과해 외부 충격에 대응할 여력이 전혀 남아있지 않았다.
막대한 배당금 지급과 차입금 급증이 동시에 일어난 것은 모회사들이 여천NCC의 장기적인 재무 건전성보다 단기적인 현금 확보를 우선시했음을 증명하는 결정적 증거다. 이는 단순한 재무적 결정이 아니라 합작 법인 구조에 내재된 근본적인 지배 구조 실패를 반영한다. 모회사들은 여천NCC를 장기적 성장을 위해 육성해야 할 독립된 기업이 아닌 자원을 착취하기 위한 '현금 인출기(ATM)'로 취급했다. 이러한 '착취적 지배 구조'는 시장 침체가 닥치기 수년 전부터 위기의 씨앗을 뿌리고 있었다.
파국으로 치닫는 동업…최후의 기폭제로 작용한 주주 갈등
위기가 현실로 다가오자 지난 25년 간 이어온 한화그룹과 DL그룹의 동업 관계는 파국으로 치달았다. 다운스트림 사업을 위해 안정적이고 저렴한 에틸렌 공급이 절실했던 한화솔루션은 즉각적인 자금 지원을 주장했다. 반면 고부가가치 스페셜티 중심으로 사업 포트폴리오를 다각화한 DL케미칼은 여천NCC를 회생 불가능한 자산으로 보고 법정 관리(워크 아웃)를 통한 구조조정을 고수했다.
갈등의 핵심에는 원료 공급 계약이 있었다. 한화그룹은 DL케미칼이 여천NCC로부터 시세보다 낮은 가격에 원료를 공급받아 사실상 여천NCC의 손실을 대가로 자사의 이익을 챙겼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반면 DL케미칼은 여천NCC의 최소 마진을 보장할 수 있는 '가격 하한선(하방 캡)' 설정을 한화그룹 측이 거부하고 최저가 구매만 고집해 여천NCC의 손실을 키웠다고 반박했다.
이 갈등은 국세청이 이러한 내부 거래에 대해 1006억 원의 추징금을 부과하면서 촉발됐다. 한화그룹은 추징금의 96%에 달하는 962억원이 DL케미칼과의 거래에서 비롯됐다며 이를 DL케미칼의 책임론을 뒷받침하는 증거로 내세웠다.
결국 동등한 파트너십을 보장하기 위해 설계된 50대 50의 지분 구조는 각자가 상대방의 의사 결정을 마비시킬 수 있는 '거부권 통치(vetocracy)'로 변질됐다. 이 갈등은 두 모회사가 근본적으로 다른 전략적 이해 관계를 갖게 됐음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한화그룹의 사업 모델은 여전히 범용 화학 제품 사이클의 운명에 깊이 연관돼 있어 여천NCC의 생존이 중요했다. 반면 스페셜티 중심으로 전환한 DL케미칼은 여천NCC에 대한 의존도가 낮아 손실을 끊어낼 의지가 더 강했다. 따라서 여천NCC 위기는 한국 화학 산업의 미래에 대한 두 가지 상반된 비전이 충돌하는 대리전의 성격을 띠게 됐다.
긴급 수혈 이후에도 위태로울 여천NCC의 생명줄
정부와 여론의 압박 속에서 한화그룹과 DL케미칼이 각각 1500억 원씩 총 3000억 원의 긴급 자금을 대여 방식으로 출자하기로 합의하며 여천NCC는 급한 불을 껐다. 이 조치는 임박했던 부도를 막는 임시방편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는 '총상에 반창고를 붙인 격'이다. 3000억 원의 지원금 역시 상환해야 할 부채여서 회사의 부채 부담만 가중시켰다. 여천NCC는 2027년까지 상환해야 할 차입금이 1조7516억 원에 달하는 거대한 부채의 산을 여전히 마주하고 있다. 기적적인 시장 회복 없이는 또 다른 유동성 위기가 닥치는 것은 시간 문제일 뿐이라는 게 시장의 중론이다. 이 긴급 수혈은 여천NCC의 △비경쟁적 사업 모델 △붕괴된 글로벌 시장 △주주 간의 깊은 불신이라는 근본적인 문제를 전혀 해결하지 못했다.
때문에 여천NCC 문제는 여전히 뇌관이 살아있는 '시한 폭탄'으로 남아있어 회사의 자구책과 한화-DL 양측의 후속 대책에 귀추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