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조 사업’ KDDX, 또 표류 위기…방사청 입장 번복에 ‘K-방산 혼선’

에너지경제신문 입력 2025.10.01 17:50

수의 계약 대 경쟁 입찰…HD현대중공업-한화오션의 동상이몽

‘신뢰 보호 원칙’ 흔든 방사청…결국 법정 가는 KDDX 사업

심화되는 안보 공백에 ‘K-방산’ 브랜드 이미지 타격 불가피

정치권도 해법 못 찾아… 출구 없는 분쟁, 방산 생태계 ‘고사’

최악은 ‘장기 표류’…전력 공백 우려, 탈 정치화 해법 모색 시급

지난 5월 부산에서 열린 국제해양방위산업전(MADEX) 2025에 전시된 HD현대중공업의 KDDX 모형. 사진=박규빈 기자

▲지난 5월 부산에서 열린 국제해양방위산업전(MADEX) 2025에 전시된 HD현대중공업의 KDDX 모형. 사진=박규빈 기자

감점 기간 만료를 불과 한 달 반 앞둔 시점에서 방위사업청이 내린 결정이 대한민국 방위 산업 전체를 뒤흔들고 있다. 2030년까지 6000톤급 차세대 구축함 6척을 건조하는 데에 총 사업비 7조8000억원이 소요되는 한국형 차기 구축함(KDDX, Korea Destroyer Next Generation) 사업의 향방을 결정지을 HD현대중공업의 보안 감점 기간을 돌연 1년 이상 연장한 것이다.




방사청은 '새로운 법률 검토' 결과를 내세웠지만 HD현대중공업은 '기울어진 운동장'을 만드는 부당한 조치라며 법적 대응을 예고했다. 단순한 행정 해석 변경으로 보기 힘든 이번 결정의 이면에는 KDDX 사업을 둘러싼 두 거대 기업의 사활을 건 대결과 복잡한 정치적 역학 관계가 얽혀있다.


KDDX 사업은 대한민국 해군 미래 함대의 초석이다. 이 함정들은 1998년에서 2000년 사이에 취역 함령이 25년을 초과한 노후한 광개토대왕급(DDH-I) 구축함을 대체하기 위해 지정됐다. 광개토대왕급은 성능 개량을 거쳤으나, 선체의 수명과 플랫폼 자체의 근본적인 능력은 한계에 다다르고 있다.



이미 최초 작전 능력 확보 목표 시점이 당초 2030년에서 최소 2032년으로 지연된 이 사업의 표류는 해군력의 공백이라는 직접적인 위험을 초래한다. 이 같은 공백은 중국과 일본 등 주변 해양 강국들이 공격적으로 함대를 증강하는 시점에 발생해 전략적 부담을 가중시키고 있다.


KDDX는 센서·전투 체계·무장에 이르는 거의 모든 핵심 체계를 국내 기술로 개발하는 최초의 구축함으로, 한국 해군 기술의 비약적인 도약을 상징한다. 때문에 KDDX 사업은 단순한 함정 교체를 넘어 대한민국 해군의 전략적 방향성을 바꾸는 중대한 전환점으로 꼽힌다.




국산 전투 체계와 플랫폼 설계를 통해 완전한 기술 자립을 추구하는 것은 미국 이지스 시스템에 의존했던 과거에서 벗어나 최상위 해군 강국으로 도약하려는 국가적 목표를 반영한다. 따라서 현재의 사업 정체는 단순한 일정 지연이 아니라 이러한 국가 전략 목표에 대한 심각한 차질을 의미한다.


함정 건조 사업은 통상 개념 설계→기본 설계→상세 설계·선도함 건조→후속함 건조 순으로 진행된다. KDDX 사업에서는 대우조선해양(현 한화오션)이 개념 설계를, 현대중공업(현 HD현대중공업)이 2023년 12월 기본 설계를 완료했다.


그러나 프로젝트는 기본설계 완료 직후부터 핵심 단계인 상세 설계와 선도함 건조로 나아가지 못한 채 거의 2년간 교착 상태에 빠져 있다. 이는 해군과 방산 생태계 전반에 막대한 불확실성을 야기하고 있다.


원죄(原罪): 군사 기밀 유출 사건의 해부

2012년부터 2015년 사이 현대중공업 직원 9명은 19차례에 걸쳐 군사 기밀 문건을 불법 취득해 사내에 공유했다. 유출된 자료에는 경쟁사인 대우조선해양이 수행하던 KDDX 개념 설계도와 잠수함 관련 문건 등 매우 민감한 정보가 포함돼 있었다. 이는 단순히 정보를 수동적으로 받은 것이 아니라 경쟁사의 지적 재산과 기밀에 해당하는 해군의 요구 사항을 법에 어긋나는 방식으로 확보해 경쟁 우위를 점하려는 능동적인 범죄 행위였다.


이에 연루된 직원 9명은 군사 기밀 보호법 위반 혐의로 기소됐다. 법적 절차는 두 단계로 나뉘어 종결됐다. 먼저 직원 8명에 대한 유죄가 2022년 11월 대법원에서 최종 확정됐다. 그러나 나머지 1명에 대한 유죄 판결은 2023년 12월에야 확정됐다. 애초 동일한 사건 번호로 기소된 사건의 판결이 이렇게 시차를 두고 확정된 사실은 훗날 방사청이 기존 입장을 뒤집는 핵심 빌미가 됐다.


방사청 대변인실 관계자는 “기소는 9명이 같이 됐는데 8명에 대한 1심 판결만 났고, 나머지 1명에 대해선 검찰이 항소해 2심으로 넘어가 사건이 2개로 쪼개진 것으로 법무 검토 결과가 나왔다"고 말했다.


군사 기밀 유출 사건으로 인해 방사청은 HD현대중공업에 대해 모든 경쟁 입찰에서 1.8점의 보안 감점을 부과했다. 당초 이 감점은 올해 11월까지 적용될 예정이었다. 이 페널티의 실질적인 파급력은 2023년 7월 울산급 배치-III 호위함 5·6번함 입찰에서 증명됐다.


당시 입찰에서 HD현대중공업은 기술능력평가에서 더 높은 점수를 획득했다. 그러나 1.8점의 보안 감점이 적용되자 최종 점수에서 한화오션이 0.1422점이라는 근소한 차이로 사업을 수주했다. 이 사건은 보안 감점이 명목상의 징벌이 아니라 수주 당락을 결정하는 치명적인 요소임을 입증했다.


이는 양사의 입장을 더욱 극단으로 몰고 갔다. 한화오션은 경쟁 입찰이 정당한 승리의 길임을 확인했고, HD현대중공업은 경쟁 입찰을 '기울어진 운동장'으로 규정하며 감점이 적용되지 않는 수의 계약을 더욱 강력하게 요구하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울산급 호위함 수주 실패는 KDDX 분쟁의 성격을 단순한 사업 경쟁에서 '존망을 건 기업 전쟁'으로 변질시킨 촉매제였다. 이전까지 감점의 영향은 이론적인 논쟁에 머물렀지만 이 사건 이후 HD현대중공업에게 KDDX 경쟁 입찰은 승리가 불가능한 싸움이라는 현실이 됐다. 이는 수의계약이 아니면 안 된다는 강경한 입장을 굳히게 만들었고, 타협의 여지를 없애며 갈등의 수위를 최고조로 끌어올렸다.


수의 계약과 경쟁 입찰, 그리고 방사청의 신뢰 위기

HD현대·한화 CI. 사진=박규빈 기자

▲HD현대·한화 CI. 사진=박규빈 기자

HD현대중공업은 기본 설계 수행사로서 관례와 효율성에 따라 상세 설계와 선도함 건조를 수의 계약으로 진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군이 원하는 '적기 전력화'를 달성하는 가장 빠른 길이라고 강조한다.


한편 한화오션은 HD현대중공업이 저지른 군사 기밀 탈취는 전례가 없는 범죄여서 수의 계약이라는 특혜를 받을 자격을 상실케 한다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연유로 한화오션은 공정하고 투명한 경쟁 입찰을 요구하고 있다.


한화오션 관계자는 “애초부터 경쟁 입찰을 염두에 둬 준비는 이미 다 해둬 사업자 재선정이 이뤄져도 충분히 빠르게 사업을 진행시킬 수 있다"고 자신했다.


두 회사 사이에서 방사청은 초기에 HD현대중공업과의 수의 계약에 무게를 두면서도 한화오션을 달래기 위해 공동 설계나 후속함 물량 분할 같은 '상생 협력 방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이러한 방안들은 양측 모두로부터 사실상의 하청 관계라며 거부당했다. 방사청의 어설픈 중재 시도는 결단력 있는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는 무능만 드러냈다는 게 업계 중론이다.


방사청의 입장 번복…보안 감점 연장 결정에 깨진 '신뢰 보호의 원칙'

종전까지 방사청은 1년 넘게 군사 기밀 유출 사건을 단일 사건으로 간주하며 1.8점의 보안 감점이 2022년 11월부터 3년인 2025년 11월까지 적용된다는 입장을 견지해왔다. 그랬던 방사청은 지난달 30일 돌연 기존 입장을 뒤집었다. 새로운 법률 검토 결과 2022년과 2023년의 유죄 판결은 별개의 사건으로 봐야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기존 1.8점 감점은 2025년 11월에 만료되지만 2023년 12월 판결을 근거로 한 새로운 1.2점의 감점이 2026년 12월까지 3년이 추가 적용된다는 것이다. 이 결정은 KDDX 사업자 선정 방식이 막바지 결정 단계에 이른 시점과 기존 감점 기간 만료를 불과 1년여 앞둔 시점에 내려졌다.


HD현대중공업은 이 결정의 시점에 강한 의구심을 표하며 이는 자사가 경쟁 입찰에서 승리하는 것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려는 의도를 가진 '기울어진 운동장'을 만드는 조치라고 맹비난했다. 또 당국의 결정에 대해 행정 소송을 포함한 모든 법적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즉각 발표했다.


HD현대중공업 관계자는 “방사청은 어떤 근거와 이유를 갖고 이런 결정을 내렸는지 통지하지도 않았다"며 “아직 당국이 법적 효력이 있는 공문을 보내거나 조치를 하지 않은 상태이고, 실제 그와 같은 방식으로 진행이 되면 소송도 불사하겠다"고 전했다.


핵심 법적 논거는 국내 행정법의 기본 원칙인 '신뢰 보호의 원칙' 위반이 될 가능성이 높다.


이 주장이 인용되려면 HD현대중공업은 방사청이 '감점은 2025년 11월에 종료된다'는 공적 견해를 표명했다는 점과 국가 방위 사업 총괄 기관인 방사청의 발표는 신뢰할 가치가 있었다는 점, 이 발표를 믿고 사업과 법적 전략을 수립했다는 점, 방사청의 입장 선회가 그 신뢰를 침해해 직접적인 불이익을 받았다는 점을 입증해야 한다.


법정에서의 핵심 쟁점은 방사청이 입장 번복을 통해 달성하려는 공익인 기밀 유출 처벌 강화가 HD현대중공업의 신뢰 이익 침해보다 더 큰지를 가려보는 일이 될 것으로 보인다.


방사청의 입장 번복은 정치적 문제를 행정적 수단으로 해결하려다 법적 위기를 자초한 전형적인 사례로 볼 수 있다. 군사 기밀 유출 전력이 있는 기업과 수의 계약을 체결하는 것에 대한 여론과 정치적 부담이 문제였다. 방사청은 타협안 도출에 실패하고 정치적으로 민감한 결정을 내리지 못하자, 감점 연장이라는 행정적 조치를 통해 HD현대중공업을 비판하는 여론을 무마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묘수'는 행정의 일관성이라는 법치주의의 대원칙을 무시함으로써 스스로를 소송의 피고가 되는 길을 면치 못하게 만들었다.


방사청 대변인실 관계자는 “HD현대중공업과 수의 계약까지 하려 했던 것과 두 개로 나뉘어진 군사 기밀 보호법 위반 사건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 않느냐"며 “신뢰 보호 원칙이라는 건 처음 들어본다"고 답변했다.


KDDX 분쟁은 국회 국방위원회로까지 확산됐다. 특히 HD현대중공업의 기반인 울산과 한화오션의 기반인 거제를 지역구로 둔 의원들이 각자의 지역 산업을 대변하며 갈등을 증폭시키고 있다. 국방위는 청문회를 열고 방사청의 우유부단함과 기존 약속 불이행을 질타했지만 최근 열린 당정 협의회에서도 수의 계약과 경쟁 입찰, 상생안 모두 법적·현실적 문제점만 확인했을 뿐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이는 정치권 역시 행정부와 마찬가지로 교착 상태에 빠져 있음을 보여준다.


심화되는 전력 공백과 실추된 'K-방산' 브랜드의 이미지

2023년 5월 부산에서 열린 국제해양방위산업전(MADEX) 2023에 전시된 한화오션의 KDDX 모형. 사진=박규빈 기자

▲2023년 5월 부산에서 열린 국제해양방위산업전(MADEX) 2023에 전시된 한화오션의 KDDX 모형. 사진=박규빈 기자

HD현대중공업과 방사청 간 법적 분쟁이 장기화될 경우 사업 지연은 수년 더 길어질 수 있다. 이는 역내 불안정이 고조되는 결정적인 시기에 해군이 노후 함정의 수명을 억지로 연장하거나 축소된 구축함 함대를 운용해야 하는 상황을 초래할 수 있다.


이는 곧 북한과 중국의 해군력 증강에 대응하는 대한민국의 대양 작전 능력을 약화시키는 실질적인 국가 안보 위협 요인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또한 사업 지연은 '기술 진부화'의 위험을 낳는다. KDDX를 위해 개발된 최첨단 기술들이 함정이 실전 배치될 때쯤에는 더 이상 최신 기술이 아니게 될 수 있다.


방사청 대변인실 관계자는 “해군의 전력 공백과 기술 진부화 문제와 관련해 우리는 KDDX 전력화를 최우선으로 여긴다"며 “현 시점에서 갈등 해결 방안이나 출구 전략이 있다면 HD현대중공업과 논의해봐야 한다고 본다"고 했다.


대한민국은 신뢰성 있고 신속하며 고품질의 첨단 무기 체계 공급 국가로서 'K-방산'이라는 강력한 브랜드를 구축했다. KDDX 사태는 이러한 이미지에 정면으로 위배된다. 공개적인 내부 다툼과 스파이 행위 비난, 정부의 정책 혼선은 잠재적인 해외 고객들에게 혼란과 불안정의 이미지를 심어준다.


정부는 대규모 해외 수주를 위해 국내 기업들이 협력하는 '원팀' 전략을 강조해왔다. 그러나 국가 핵심 사업인 KDDX를 두고 벌이는 극심한 국내 분쟁은 이 전략을 위선적이고 비효율적으로 보이게 만든다. 국내에서조차 '원팀'을 이루지 못하면서 해외에서 '원팀'을 구성하자는 주장은 △33조원 규모 캐나다 잠수함 사업 △미 해군 MRO·함정 건조 △호주 호위함 수주 실패 사례 앞에서 설득력을 잃는다.


KDDX 위기는 'K-방산' 수출 모델에 대한 실전 스트레스 테스트임과 동시에 치명적인 구조적 결함을 드러내고 있다. 이 모델은 치열한 국내 경쟁이 혁신과 가격 경쟁력을 이끈다는 전제 위에 세워졌다. 그러나 국가의 미래를 좌우하는 '승자 독식' 프로젝트에서는 그 경쟁이 상호 파괴적으로 변질돼 수출 시장에까지 악영향을 미치는 역설이 발생하고 있다.


사업 추가 지연은 두 거대 조선사뿐만 아니라 부품과 서비스를 공급하는 수백 개의 중소 협력사들에도 타격을 준다. 이들 기업은 수년 간의 불확실성을 견딜 자본이 부족하다. 프로젝트의 마비는 투자를 위축시키고 일자리를 위협하고 K-방산 생태계 전반의 특화된 기술력과 역량을 잠식시킬 수 있다.


HD현대중공업이 소송을 진행하고, 법원이 최종 판결까지 수년이 걸릴 경우 KDDX 사업은 사실상 동결될 수 있어 이는 해군에게 최악의 시나리오다. 법과 정치적 압박에 직면한 방사청이 감점 연장 결정을 철회하고 기존의 2025년 11월 만료 입장으로 회귀하는 입장 재번복이 이뤄지면 이는 수의 계약 대 경쟁 입찰이라는 원래의 교착 상태로 돌아갈 공산이 크다.


국가 안보에 미치는 심각성을 인지한 대통령실이나 국회가 개입해 해결책을 강제할 수 있다. 이는 6척의 건조 물량을 3척씩 분할하는 것과 같은 새로운 '상생안'일 수 있고 정치적으로는 편리하지만 생산 효율성 측면에서는 최선이 아닐 수 있다는 위험 요소가 존재한다.


최우선 과제는 신속하고 투명하며 법적으로 완결성 있는 사업 방식 결정이다. 현재의 불확실한 상태는 어떤 단일 결정보다 더 큰 해악을 끼치고 있다는 게 업계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외부 법률 조달 전문가가 참여하는 독립적인 검토위원회를 구성해 방사청과 국방부에 구속력 있는 권고안을 제시하는 방안을 고려해야 한다. 이는 결정을 탈정치화하고 방사청이 결단력 있게 행동할 명분을 제공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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