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폐에서 탈출하자”…디베이스먼트 트레이드 주목
국제금값은 또 신고가…4200달러 돌파 목전
비트코인도 동반 상승…“16만5000달러 간다”
“금값 상승은 모멘텀 트레이드”…美 국채 수요 견조

▲골드바(사진=로이터/연합)
대표적 안전자산인 금 가격이 사상 최고치 행진을 이어가는 가운데 비트코인 등 위험자산도 상승세를 이어가고 있다. 안전자산과 위험자산의 통상적인 '역(逆)의 상관관계'가 깨진 배경에는 화폐 가치에 대한 불안이 커지며 투자자들이 대체 자산으로 몰린 탓이다. 미국을 비롯한 주요국이 돈풀기를 지속하면서 금과 같은 실물자산의 가치가 더 오를 것이란 전망이 확산하고 있지만 이에 대한 반론도 적지 않다.
14일(현지시간) 뉴욕상품거래소에서 12월 인도분 국제 금 선물가격은 전장대비 0.73% 오른 온스당 4163.40달러에 거래를 마감, 신고가를 또다시 경신했다. 금 시세는 이달에만 2 거래일(2일·9일)을 제외하고 모두 오르면서 사상 처음으로 4000달러를 넘어선 데 이어 이젠 4200달러선 돌파마저 넘보고 있는 상황이다. 이로써 올해 금 시세 상승률은 58%에 달한다.
미국 기준금리가 이달 인하될 것이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는 상황 속에서 미중 무역갈등이 최근 재점화된 것이 금값을 끌어올리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하지만 금값 랠리의 근본적인 배경엔 화폐 가치 하락에 대비해 귀금속·비트코인 등 대체자산에 자금이 몰리는 '디베이스먼트 트레이드(debasement trade)'가 자리잡고 있다.
디베이스먼트는 과거 16세기 헨리 8세 시절 때 화폐 개주(改鑄)로 통화가치가 현저히 감소하는 이른바 '대붕괴'(Great Debasement)에서 비롯됐다. 헨리 8세는 재원을 충당하기 위해 화폐에 포함된 금·은 순도를 낮춰 화폐 공급을 대폭 늘렸다. 그러나 그 결과 통화 가치의 추락과 인플레이션으로 이어졌다.
지금의 통화제도는 당시와 다르지만, 각국 정부의 재정 악화 속에 가치가 훼손될 수 있는 화폐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이 다시 거세지고 있다.

▲지난 1년간 국제금값 추이(사진=네이버금융)
◇ “금이 달러보다 안전"…대세로 부상한 디베시으먼트 트레이드
미국의 경우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출범 이후 동맹국까지 포함한 관세 정책을 실행하고 있고 막대한 재정 적자를 가중시킬 감세안을 발효했다. 미국 회계감사원은 현재 추세가 이어질 경우 2050년 국가 부채가 국내총생산(GDP)의 두 배에 이를 것이라고 경고했다. 여기에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ed·연준)에 대한 금리 인하 압박도 이어가자 올 들어 탈(脫)달러 현상이 두드러졌다.
실제 세계 주요 6국 통화 대비 달러 가치를 보여주는 달러인덱스 선물은 작년 말 108.38였지만 현재 98.6수준을 기록, 올 한 해에만 10% 가까이 추락했다. 또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각국 중앙은행들의 외환보유액에서 달러가 차지하는 비율이 작년 6월 30일 44.3%에서 올 2분기말 40.3%로 떨어졌다. 같은 기간 금은 18.0%에서 22.9%로 늘었다.
비슷한 현상은 일본과 유럽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지난 4일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다카이치 사나에가 승리하자 엔화와 일본 국채 가격이 동반 하락했다. 프랑스는 재정 불안을 둘러싼 정치 혼란으로 유로화가 약세를 보였고, 영국 역시 예산안 발표를 앞두고 국채 시장이 다시 흔들리고 있다고 블룸버그는 전했다.
월가 주요 거물들도 금투자에 대해 긍정적인 견해를 내놓고 있다. '월가 황제'로 불리는 제이미 다이먼 JP모건체이스 최고경영자(CEO)는 이날 한 행사에서 “보유하는 데 4%의 비용이 들기 때문에 나는 금을 구매하지 않는다"면서도 “현 환경에선 금값이 5000~1만달러까지 쉽게 오를 수 있다. 포트폴리오에 금을 추가하는 것이 어느 정도 합리적인 경우는 드물다"고 말했다.
억만장자 투자자인 레이 달리오, 켄 그리핀도 금이 달러보다 더 안전할 수 있다고 최근 주장했다. 달리오는 “금은 포트폴리오에서 매우 훌륭한 다각화 수단"이라고 했고 그리핀은 “투자자들이 금을 달러보다 더욱 안전한 자산으로 여기고 있다"고 진단했다.
금값 랠리와 함께 은 가격 급등 역시 디베이스먼트 트레이드의 연장선으로 풀이된다.

▲지난 1년간 비트코인 시세 추이(단위=1000달러, 사진=코인마켓캡)
◇ 위험자산 비트코인도 동반 랠리…“금 뒤이을 것"
비트코인 등 위험자산도 인플레이션에 대응할 수 있는 대체 투자처로 주목받고 있다. JP모건은 이달 초 보고서에서 비트코인이 금에 이어 디베이스먼트 트레이드의 다음 주자로 부상할 수 있다며 가격이 16만5000달러까지 상승할 여력이 있다고 내다봤다. 비트코인 시세는 최근 미중 무역갈등 재점화로 휘청였지만 올해 상승률은 여전히 20%를 넘어섰고 이달초엔 신고가를 경신하기도 했다.
전문가들은 달러 등 전통 화폐에서 벗어나 대체자산으로 자금이 쏠리는 추세가 장기화할 것으로 입을 모은다. 블랙록에서 채권 총괄로 지낸 스티븐 밀러는 “40년간 일하면서 통화와 국채에서 대체자산으로 이처럼 큰 규모의 자금 이동은 처음"며 “디베이스먼트 트레이드는 앞으로 지속될 여지가 있다"고 블룸버그에 말했다.
XTB의 캐틀린 브룩스 리서치 책임도 “세상이 얼마나 변했는지 알 수 있으며, 디지털 자산이 현재 환경에서 더 신뢰할 수 있는 가치의 원천이 되고 있다는 신호일 수 있다"며 “디베이스먼트 트레이드가 조만간 끝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고 내다봤다.
◇ 美 국채 수요 견조…“모멘텀 트레이드에 불과" 주장
반론도 만만치 않다. 미 국채에 대한 글로벌 투자자들의 수요가 여전히 견조하기 때문이다.
최근 미 월스트리트저널(WSJ)은 “투자자들이 실제 디베이스먼트를 우려한다면 장기 인플레이션 기대치를 나타내는 미 채권시장에서 변화가 없는 점이 이상하다"며 “투자자들은 지속적인 인플레이션이 장기적으로 미 국채 가치를 훼손시키지 않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고 전했다.
실제 30년 만기 미 국채 금리는 현재 연 4.61% 수준으로, 연초 5%에 근접했던 때보다 낮다. 30년 국채 금리는 지난달부터 2개월 연속 하락세를 이어가고 있다.
WSJ는 “장기적인 문제와 지금 당장 일어나는 일을 구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짚었다.
또 해외 투자자들이 미국 주식에 투자하기 위해서는 달러를 사야 한다는 점에서 현재 뉴욕증시의 강세가 디베이스먼트 트레이드 논리를 약화시킨다는 지적도 있다.
미즈호증권의 오모리 쇼키 수석 전략가는 “화폐와 채권이 비트코인과 금으로 대체될 수 있다는 생각은 비현실적"이라며 현재 금값 강세 등이 펀더멘털과 무관한 모멘텀 트레이드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마크 커드모어 블룸버그 마켓라이브 총괄 편집자는 “디베이스먼트 트레이드는 최근 몇 달간의 이례적인 시장 움직임을 설명하는 데 합리적"이라면서도 “이 용어가 널리 퍼졌다는 것은 투자자들이 한쪽으로 쏠렸음을 보여주는 신호일 수 있다"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