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정책적 시험대에 오른 ‘원전 실용주의’
고리2호기 재가동이 상징적 분수령…‘탈원전도 친원전도 아닌’ 제3의 길 시험대
지지기반인 탈핵진영은 폐지 강력 촉구 반발
산업계는 “현실적 선택 불가피”…첨단산업 경쟁력&에너지 안보 논리
▲고리원전
이재명 정부가 내세운 '에너지 실용주의' 노선이 중대한 분수령을 맞았다.
최근 원자력안전위원회(원안위)가 고리2호기 재가동 승인 결정을 보류하면서, 정부가 향후 어느 방향으로 에너지정책의 균형점을 잡을지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원안위가 보류를 결정한 이유는 서류 형식상의 사유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구체적으로는 1980년대 허가 당시와 비교해 추가된 자료 요구와 사고 관리 계획서의 절차적 하자 논란, 주기적 안전성 평가 보고서 제출 기한 초과, 방사선환경영향평가서 보완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이를 두고 원자력계는 “과도한 심사 지연으로 국민 부담만 가중되고 있다"며 재가동 승인을 촉구하고 있는 반면 일부 시민단체들은 보류 결정 자체가 재가동을 고민하고 있는 것이라며 폐쇄를 주장하고 있다.
한편 이재명 대통령은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 “가동 기한이 지난 원전도 안전성이 담보되면 연장해서 쓰고, 짓던 것도 잘 지어야 한다"고 밝혔다. 이는 윤석열 정부의 '친원전 드라이브'보다는 신중하지만,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노선과는 확실히 결이 다르다.
대통령은 이어 “신규 원전 건설 대신 풍력·태양광 등 재생에너지를 대대적으로 확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시 말해, “안전이 확보된 기존 원전은 활용하되, 에너지 전환의 중심축은 재생으로 옮긴다"는 실용적 접근이다.
이 같은 기조는 현재 기후에너지환경부가 추진 중인 '전원믹스 합리화'와 '노후 원전 안전투자 강화' 방침과도 맞물린다. 원전은 전력계통의 안정성과 기저전원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고, 신재생은 중장기적으로 비중을 확대하는 이중 구조다.
탈핵진영의 반발 “고리2호기 폐쇄 결단해야"
하지만 정부의 이런 '균형 노선'에 여권 지지기반의 한 축인 탈핵·환경 시민단체들이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지난 27일 탈핵부산시민연대는 부산시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원안위의 고리2호기 사고관리계획서 심의를 “요식행위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이들은 “대기확산인자, 항공기 충돌 대응 기준 등 핵심 기술 검토가 미비한 상태에서 승인 표결을 강행했다"며, “이재명 정부는 침묵하지 말고 고리2호기 폐쇄와 탈핵을 결단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시민단체들은 이번 결정이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가치'와 결별하는 신호가 될 것을 우려하고 있으며, 정부의 실용주의가 결국 '정책 후퇴'로 귀결될 수 있다고 반발하고 있다.
산업계는 “현실적 선택 불가피"… 에너지 안보 논리 부상
반면 산업계와 전문가들은 “원전 실용주의는 불가피한 현실 대응"이라고 평가한다.
급격한 전력수요 증가, 특히 AI데이터센터와 수소·LNG발전의 불안정한 공급 구조, 그리고 탄소중립 목표 달성을 위한 저탄소 기저전원 확보 필요성이 겹치면서, 원전을 완전히 배제하는 정책은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다.
한 원전업계 관계자는 “고리2호기 같은 기존 원전은 이미 감가상각이 끝나 경제성이 높고, 안전성만 확보된다면 탄소중립 달성 과정에서 유용한 완충 역할을 한다"고 평가했다.
이는 이재명 정부가 말하는 '안전기반 실용주의'와 일맥상통한다.

원자력학회가 제시한 '원전 실용주의'의 3대 전제조건
원전업계 전문가들은 이재명 정부가 내세운 '원전 실용주의' 기조가 지속 가능하려면 세 가지 전제조건이 반드시 충족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첫째, 투명한 안전성 검증 체계가 필요하다. 원자력안전위원회의 독립성을 강화하고 기술적 검증 절차를 명확히 공개해야 국민 신뢰를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 정치적 프레임에서의 탈피가 요구된다. '탈원전 대 친원전'이라는 이념적 대립 구도를 벗어나, 에너지 안보·탄소중립·산업경쟁력이라는 실질적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셋째, 국민 설득력 확보가 필수적이다. 실용주의 노선이 단순한 정치적 타협이 아니라, 현실적 최적화를 위한 정책 선택임을 명확히 설명해야 사회적 공감대를 이끌 수 있다는 것이다.
고리2호기 이후의 방향이 곧 '이재명 에너지정책 방향타'
고리2호기의 재가동 여부는 단순히 한 원전의 운명을 넘어 이재명 정부가 내세운 '실용주의 에너지전환'의 첫 번째 리트머스 시험지다. 12차 전력수급기본계획 등 향후 전원믹스 구도와 탄소중립 로드맵, 나아가 정치적 정체성까지 규정할 수 있는 사건이 될 수 있다.
기술·정책적 논의를 넘어 정치적 파장도 상당할 것으로 관측된다. 이재명 대통령이 '탈원전이 아니다'라는 공언을 지킬 것인지, 아니면 핵심 지지세력의 요구를 수용해 다시 탈원전 노선으로 선회할 것인지에 업계는 물론 시민단체의 시선이 집중되고 있다.
에너지업계 관계자는 “고리2호기 결정은 이재명 정부가 말하는 '실용주의 정부'가 진짜인지 보여주는 시험대"라며 “정치적 계산을 배제하고 현실적 선택을 할 수 있을지, 향후 5년 에너지정책의 향방이 달려 있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