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행정부, IEA 탈퇴 위협
기후변화 대응에서 물러선 IEA
美 에너지부 장관
“넷제로는 파괴적 환상”
글로벌 에너지 정책
화석연료 중심 재편 가능성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사진=AFP/연합)
세계 에너지 정책 방향을 제시해 온 국제에너지기구(IEA)가 핵심 회원국인 미국의 압박 속에 기후변화 대응에서 한발 물러섰다는 관측이 제기됐다.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IEA 각료급 이사회(각료 이사회)에서 기후변화와 탄소중립(넷제로)이 주요 우선순위에서 제외되면서다. “기후변화는 사기극"이라고 주장해 온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반(反)기후 노선이 글로벌 무역·안보 질서를 넘어서 기후 협력 체제에도 균열을 일으켰다는 해석도 나온다.
19일(현지시간) 폴리티코, 블룸버그통신 등 주요 외신에 따르면 이날까지 이틀간 진행된 IEA 각료 이사회에서 공동성명이 채택되지 않았다. 2년마다 열리는 IEA 각료 이사회는 회원국 에너지 장·차관급이 모여 글로벌 에너지 정책의 방향과 주요 과제를 논의하는 최고위급 회의다. 이번 회의에는 33개 회원국, 17개 가입추진 및 준회원국, 5개 초청국 등 총 55개국의 장·차관급 인사들이 참석했다. 한국에선 기후부 이호현 2차관이 참여했다.
이번 IEA 각료 이사회에서 공동성명이 채택되지 않은 것은 9년 만의 일이다. 블룸버그는 기후변화부터 우크라이나 전쟁까지 주요 현안에 대한 회원국들의 통일된 입장을 담은 공동성명을 내놓지 못한 것은 2017년 이후 처음이라고 지적했다.
불과 2년 전 열렸던 2024년 IEA 각료 이사회에서는 지구 온난화를 1.5도로 제한하기 위해 청정에너지 전환을 가속화하는 것을 골자로 한 공동성명이 발표된 바 있다.
그러나 이번 회의에선 '의장 요약문'이 공개됐는데 이마저도 기후변화 대응이 IEA의 핵심 우선순위로 명시되지 않았다고 폴리티코는 전했다. 실제로 요약문은 기후변화에 대해 “다수의 장관들은 기후변화 대응을 위해 에너지 전환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했으며, COP28 합의에 부합하는 세계적 탄소중립(넷제로) 전환의 필요성을 언급했다"는 문장으로 한 차례만 언급되는 데 그쳤다. 대신 에너지 안보, 핵심 광물, 원자력 발전, 인공지능(AI) 등이 주요 의제로 제시됐다.
이번 결과에 대해 의장국인 네덜란드의 소피 헤르만스 기후녹색성장부 장관은 “각국의 지정학적 상황이 반영됐다"며 “많은 것이 바뀐 만큼 2년 전과 단순 비교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폴리티코는 “이번 회의는 기후위기 대응과 화석연료의 퇴출이 최우선 과제로 명시됐던 2년전의 모습에서 반전됐다"며 “청정에너지 전환을 둘러싼 기류가 급변했음을 보여주는 결과"라고 지적했다.
▲2026 IEA 각료 이사회에 참석한 크리스 라이트 미 에너지부 장관(사진=EPA/연합)
IEA의 이같은 변화는 핵심 돈줄 역할을 하는 미국의 입김이 크게 작용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미국은 매년 약 600만달러를 IEA에 지원하는 등 정규 예산의 약 14%를 부담하고 있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이날 크리스 라이트 미국 에너지부 장관은 IEA가 1년 이내 탄소중립 목표 지지를 철회하지 않을 경우 미국이 IEA를 탈퇴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지난 10년간 '2050년 넷제로'라는 파괴적인 환상에 집단적으로 매몰됐다"며 “미국은 보유한 모든 압박 수단을 활용해 향후 1년 안에 IEA가 이 의제에서 벗어나도록 만들 것"이라고 강조했다. 라이트 장관은 또 탄소중립에 대해 “에너지를 더 비싸게 만들고 성장을 위축시켰다"며 “달성 가능성은 0.0%"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미국의 IEA 탈퇴 가능성은 단순한 엄포로만 보기는 어렵다는 평가도 나온다. 트럼프 대통령은 파리기후변화협약과 유엔기후변화협약(UNFCCC) 등에서 잇따라 탈퇴하며 친(親)화석연료 정책을 강화해 왔다.
미국이 IEA에서 이탈할 경우 탄소중립을 향한 국제 공조가 약화되는 것은 물론, 글로벌 에너지 정책이 화석연료 중심으로 재편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에 대해 라이트 장관은 “많은 국가들이 넷제로 목표에서 벗어나 화석연료 생산과 소비를 늘려야 한다는 미국의 입장에 비공개적으로 동의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IEA 내부적으로는 이미 탄소중립에 후퇴하는 징후가 나타나고 있다. IEA는 지난해 발표한 '2025 세계 에너지 보고서'에서 기존의 국가 에너지 정책을 바탕으로 하는 전망인 '현재 정책 시나리오'(Current Policies Scenario·CPS)를 다시 도입했다. IEA는 2020년부터 CPS를 '명시된 정책 시나리오(Stated Policies Scenario·STEPS)'로 대체해 왔으나, STEPS가 정책 이행 여부와 무관한 가정에 기반해 청정에너지로의 전환 전망이 지나치게 낙관적이라는 비판이 미 공화당을 중심으로 제기됐었다.
CPS에 따르면 글로벌 석유 수요는 2050년까지 13% 증가할 것으로 전망됐다. 이는 전 세계 자동차 판매에서 전기차가 차지하는 비중이 2035년 이후 대체로 정체되는 것을 전제로 뒀다. IEA는 2024년까지만 해도 석유 수요가 2030년에 정점을 찍을 것이라고 주장해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