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급 확대·금융 정교화·복지 확장…35년 정책 흐름 총점검
“60년 투기억제 실패”, “정부 목표는 내 집 마련·임대 안정”
AI·지방화·청년 주거까지… “생활정책으로 전환해야”
▲19일 서울 서초구 감정평가사회관에서 열린 한국주택학회 창립 35주년 기념 라운드테이블 토론회 '한국의 주택정책에 대한 회고와 미래 방향'에서 참석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장혜원 기자
한국 주택정책 35년의 흐름을 되짚고 미래 방향을 모색하는 자리에서 학계 원로들과 전문가들이 “가격 안정에 매몰된 규제 중심 정책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한목소리로 주문했다. 주택 공급 총량은 크게 늘었지만 체감 안정은 여전히 부족한 만큼, 앞으로의 정책은 투기 억제 일변도보다 실수요자 주거 사다리와 주거복지, 지역 맞춤형 공급 체계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지적이다.
20일 에너지경제신문 취재에 따르면 한국주택학회는 전날 서울 서초구 감정평가사회관에서 '한국의 주택정책에 대한 회고와 미래 방향'을 주제로 창립 35주년 기념 라운드테이블 토론회를 개최했다. 이날 행사에는 김정호 전 KDI 교수, 손재영 건국대 명예교수, 이상영 명지대 교수, 정의철 건국대 교수, 조만 서강대 교수, 진미윤 명지대 교수, 천현숙 전 SH도시연구원장 등이 참석해 지난 35년간의 정책 성과와 한계, 미래 과제를 논의했다.
▲이원재 한국부동산연구원장이 19일 서울 서초구 감정평가사회관에서 열린 한국주택학회 창립 35주년 기념 라운드테이블 토론회 '한국의 주택정책에 대한 회고와 미래 방향'에서 축사를 하고 있다. 사진=장혜원 기자
이원재 한국부동산연구원장은 축사에서 “1991년 200만호 수준이던 전국 아파트 재고가 2025년 1300만호로 증가하는 등 한국 주택시장은 비약적인 양적 성장을 이뤘다"며 “주택정책은 가격 안정, 주거환경 개선, 주거복지 실현, 공급 원활화 등 복합적 목표를 가진 분야인 만큼 인구구조 변화와 기술 발전, 금리 변화 등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날 발표에서는 한국 주택정책의 35년을 “공급 확대, 금융의 정교화, 정책 목표의 확장"으로 요약했다. 과거 외곽 신도시와 택지 개발 중심의 대량 공급 체제에서 최근에는 도심 정비와 사업관리 중심으로 축이 이동했고, 금융 역시 담보가치와 대출 규모 중심에서 주거서비스, 보증, 취약계층 보호를 아우르는 구조로 발전했다는 설명이다. 발표자는 “현재 주택정책은 가격 안정, 주거복지, 도시정비라는 세 축으로 구성된다"며 “문제는 이 세 축이 늘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데 있다"고 말했다.
발표자는 한국 주택정책사를 △1991~1997년 공급 기반기 △1998~2002년 시장 자율화기 △2004~2012년 정책 패키지화기 △2013~2021년 강한 수요관리와 임차제도 변화기 △2022년 이후 규제 재조정과 거래안전 강화기 등으로 구분했다. 특히 최근에는 외곽 택지 공급과 도심 재정비가 병행되지만, 정책 평가의 핵심이 단순 총량보다 도심 내 실현 가능성과 속도로 옮겨가고 있다고 분석했다.
▲김정호 전 한국주택학회장이 19일 서울 서초구 감정평가사회관에서 열린 '한국의 주택정책에 대한 회고와 미래 방향' 라운드테이블 토론회에서 좌장을 맡아 발언하고 있다. 사진=장혜원 기자
실제 이날 토론에서는 공급 확대와 거래 통제, 수요 억제 중심의 과거 정책 패러다임에 대한 비판이 쏟아졌다.
전문가들은 결국 앞으로의 주택정책이 단순히 집값을 잡는 정책이 아니라, 인구 감소와 고령화, 청년 주거 불안, 전세사기, 지역 불균형 등 복합 위기에 대응하는 생활정책이자 도시정책으로 전환돼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공급 총량 확대라는 양적 성장의 시대를 지나, 이제는 실수요자 보호와 질적 관리, 지역 맞춤형 복지와 금융 설계가 새로운 정책 경쟁력의 기준이 돼야 한다는 것이다.
손재영 건국대 명예교수는 “1960년대부터 이어져 온 투기 억제 정책이 지금까지도 중요한 주택정책 기조로 남아 있지만, 60년간 반복해도 효과가 없었다면 그 패러다임 자체를 버려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정확히 정의되지도 않은 '투기'라는 말을 앞세워 세제·금융·대출 규제를 반복해온 것은 어둠 속에서 칼질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며 “부동산 가격이 어떻게 결정되고 움직이는지에 대한 충분한 이해 없이 국민의 자산 형성과 주거 안정을 흔들어서는 안 된다"고 비판했다.
이상영 명지대 교수도 “정부가 '가격 안정' 자체를 정책의 직접 목표로 삼는 것은 불합리하다"며 “정부의 목표는 내 집 마련 지원과 저소득층 임대 안정이어야 하고, 그 과정에서 가격 안정은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결과여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시장에 단기적으로 반응하는 규제보다 생애 최초 주택구입자에게 충분한 금융을 제공하고 공공임대와 임대 안정 체계를 다지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정의철 건국대 교수는 양적 공급 확대의 성과를 인정하면서도, 이제는 공급의 양보다 질과 대상의 정교함이 중요하다고 짚었다. 그는 “주택의 양적·질적 수준은 과거보다 좋아졌지만 격차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며 “이제는 대량 공급 시대가 아니라 누구에게 어떤 형태의 주거를 제공할 것인지 더 세분화된 정책 설계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또 “공공주거정책과 주거복지정책의 큰 틀은 마련됐지만 어떤 정책이 실제로 효과적인지는 더 엄밀한 평가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김정호 전 KDI 교수는 좌평에서 “앞으로의 주택정책은 정부가 시장에 과도하게 간섭하는 구조에서 벗어나 지원과 시장 기능을 분리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며 “재건축이 만능 해법인 것처럼 접근하기보다, 도시 전체를 더 넓게 보는 재개발 방식이 주거 문제 해결에 더 적합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시장 친화적인 기법이 더 적극적으로 도입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사진 왼쪽부터) 손재영 건국대 교수, 이상영 명지대 교수, 정의철 건국대 교수가 19일 서울 서초구 감정평가사회관에서 열린 '한국의 주택정책에 대한 회고와 미래 방향' 라운드테이블 토론회에서 토론을 하고 있다. 사진=장혜원 기자
미래 과제로는 인구구조 변화, 청년 주거 문제, 지방화, AI·빅데이터 기술 활용 등이 제시됐다. 조만 서강대 교수는 “AI와 빅데이터 같은 범용기술이 가격 예측 비용을 낮추고 시장의 비효율을 줄일 수 있다"며 “정책도 이런 기술 환경 변화를 수용하는 방향으로 진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진미윤 명지대 교수는 “오피스텔, 고시원, 게스트하우스 등 통계상 '시장 밖'으로 밀려난 거주 형태를 더 이상 외면해선 안 된다"며 “우리가 양질의 주거로 인정하지 않는 영역까지 포함해 정책 시야를 넓혀야 한다"고 지적했다.
천현숙 전 SH도시연구원장은 중앙집중적 정책 구조의 한계도 언급했다. 그는 “시장 안정이 이뤄져야 복지정책 효과도 살아난다"며 “장기적으로는 주택정책의 지방화가 필요하고, 지역별 주거복지 수요에 맞춰 기능과 재원을 재배분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LH의 일원화된 기능 역시 지방화 과정에서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