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려진 양조장이 정원으로 부활…전통주 실험실 ‘변신’ [양조장 여행 ]

에너지경제신문 입력 2026.04.10 11:20

① 경기 화성 국순당 '박봉담'

백세주 태동한 옛 경기 화성양조장, 복합문화공간으로 부활

독창적 술과 스마트팜 신선함 만나는 우리 술의 R&D 실험실

취기 대신 취향 채우는 양조장 투어…무알코올 선택 '배려'

주말 나들이에 운전대를 내려놓는 것은 작지 않은 결심을 요한다. 하지만 목적지가 양조장이라면 기꺼이 치를 만한 수고로움이다. 술을 빚는 현장에서만 마주할 수 있는 생생한 맛과 향을 온전히 즐기기 위해선, 대리운전의 압박에서 해방된 '완벽한 자유'가 전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양조장 여행'은 대중교통으로 접근가능한 서울과 수도권의 양조장을 찾아 우리 전통주의 맛과 체험 프로그램을 소개하는 코너다.


박봉담 전경.

▲경기도 화성시 국순당 박봉담 전경. 사진=국순당

도심의 번잡함을 뒤로하고 수도권 지하철 수인분당선 오목천역에서 내려 약간 걸어 인근 노선버스로 환승해 한 정거장을 가면 경기도 화성시 봉담읍에 자리한 목적지에 닿는다. 근방 아파트들과 야산 사이에 거친 질감의 콘크리트 외벽과 붉게 녹슨 코르텐강 가로등이 묵묵히 서 있는 이곳은 국순당의 술 복합문화공간 '박봉담'이다. 단순히 술을 찍어내는 생산 기지(Factory)를 넘어, 사람들이 함께 모여 소통하고 관계를 만들어 나가는 공원(Park)이 되기를 바라는 뜻이 이름에 담겼다.


◇ 목련이 맞이하고 진달래가 피어난 '재생 건축'의 정원


주차장에 도착하면 먼저 '풍류정'이라는 오래된 건물이 방문객을 맞는다. 일상에서 '박봉담'이라는 비일상적 공간으로 넘어가는 전이 공간이다. 그 입구에는 하얀 꽃망울을 막 터뜨리기 직전인 목련 한 그루가 서 있다.



박봉담 중앙정원 천장이 뚫려있다.

▲박봉담 중앙정원 천장이 뚫려있다. 사진=송민규 기자

박봉담이 들어선 자리는 1986년부터 2004년까지 가동되었던 옛 국순당 화성양조장 터다. 우리나라 전통주 시장을 개척한 백세주와 국내 최초의 캔 막걸리가 탄생했던 곳이지만, 양조장이 강원도 횡성으로 이전한 후 2025년 오픈 전까지 오랜 기간 유휴 부지로 남겨져 있었다.


국순당은 이곳을 복합문화공간으로 기획하며 전면 철거가 아닌 '재생 건축'을 택했다. 건물을 완전히 헐고 새로 짓는 대신, 옛 화성양조장 시절의 낡은 철골 구조와 천장의 보를 뼈대 삼아 그대로 노출시켰다. 과거 1층과 2층 사이로 술과 재료를 실어 나르던 리프트가 오가던 천장의 뚫린 구멍은 막지 않고 남겨두어, 이제는 계절마다 자연광과 비, 눈이 쏟아지는 건축적 장치가 되었다.



방치된 시간 동안 깨진 아스팔트 틈새로 자라난 야생화와 잡초를 아예 덮어버리지 않고, 자연스럽게 잔디와 수목이 어우러지도록 조성했다.


박봉담 중앙정원 진달레

▲박봉담 중앙정원에 진달레가 피어 있다. 사진=송민규 기자

건물 안쪽으로 들어서면 마주하게 되는 중앙 정원의 풍경은 건축물과 묘한 대비를 이룬다. 특히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중정을 가로지르는 산책로 옆으로 흐드러지게 핀 보랏빛 진달래다. 밖에서는 보기 드문, 키가 훌쩍 큰 나무 형태의 진달래가 회색빛 철골과 어우러진다.


계단 역시 물을 뿌려 내부 골재의 거친 질감을 드러내는 '골재노출 콘크리트 공법'을 적용해 옛 공간의 톤을 맞췄다. 공간 곳곳에 부착된 QR코드를 스캔하면 국순당 임직원들의 목소리로 녹음된 오디오 도슨트를 통해 과거 양조장 시절의 이야기를 들으며 공간을 관찰할 수 있다. 중앙 정원 양측에는 창이 나 있어서 맥주 양조장과 스마트팜을 들여다 볼 수 있다.


박봉담 맥주 양조장(좌)과 스마트팜(우)

▲박봉담 양측에 난 창을 통해 볼 수 있는 맥주 양조장(왼쪽)과 스마트팜(오른쪽) 사진=송민규 기자

홍기준 국순당 공간마케팅팀장은 “박봉담은 단순히 생산만 담당하는 공장을 넘어, 기획부터 연구, 생산, 소비자와의 소통 전 과정을 함께 즐길 수 있는 공원으로 공간의 개념을 확장한 곳"이라고 설명했다.



◇ R&D 랩의 실험실…기호와 작대기로 읽어내는 '라벨'의 묘미


건물 내부로 들어서면 바깥의 거친 풍경과는 사뭇 다른 차분한 공기가 감돈다. 정면의 널찍한 창을 통해서는 중정의 자연을 오롯이 느낄 수 있도록 설계됐다. 시끌벅적한 주막보다는 영락없는 세련된 브런치 카페의 분위기다.


박봉담 2층 전경.

▲박봉담 2층 전경. 끝에 보이는 '술'이라고 쓰여진 공간에서 도슨트 투어 중 주류 시음을 하게 된다. 사진=송민규 기자

이곳 '박봉담 키친'은 100ℓ에서 1000ℓ 규모의 소형 탱크를 갖춘 수제 양조장에서 갓 뽑아낸 다채로운 술을 조용히 맛볼 수 있는 테이스팅 룸을 겸한다. 류수진 국순당 연구소 연구개발1팀장은 “대형 공장의 대량 생산 체제에서는 대중적인 맛을 위해 술의 개성이 둥글게 깎여나갈 수밖에 없다"며 “이곳은 그런 제약 없이 실험적인 술들을 소비자에게 가장 먼저 선보이고 평가받는 테스트베드"라고 강조했다.


제품을 빠르게 내기 위해 패키징에도 직관적인 '라벨 시스템'을 도입했다. 라벨에 그려진 쌀알이나 보리 모양의 아이콘으로 주원료를 파악하고, 항아리 그림 위 작대기 개수로 단양주, 이양주, 삼양주 등 담금 횟수를 읽어내는 식이다. 맥주 라벨의 'A' 표시는 상면 발효 방식인 에일(Ale)을 의미한다. 라벨의 기호를 해독하며 원하는 스타일을 직관적으로 골라내는 과정 자체가 양조장 투어의 색다른 묘미다.


◇ '복합미의 질서'를 찾아서…생주(生酒)와 수제 맥주의 재발견


나무 쟁반에 정갈하게 담겨 나오는 탁주 샘플러와 맥주 샘플러에는 이런 연구소의 치열한 고민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박봉담 주류 시음 샘플러.

▲주류 시음 샘플러. 제공되는 주류는 매번 다르다. 뒷면에는 해당 주류의 설명과 함께 개발자의 코멘트도 제공된다. 사진=송민규 기자

맥주 샘플러의 시그니처인 '박봉담쌀맥주'는 국내 최초 양조 전용 쌀 '설갱미'를 활용한 뉴잉글랜드 IPA 스타일이다. 박성훈 국순당 연구소 연구개발2팀 과장은 “아메리칸 스타일의 시트러스한 홉 향이 강하게 치고 들어오지만, 쌀이 들어가 끝맛이 잡미 없이 깔끔하게 떨어지는 것이 특징"이라고 짚었다. 독일 뒤셀도르프 스타일을 재해석한 밀맥주 '박봉담알트비어' 역시 쌀 특유의 깔끔한 마무리가 돋보인다.


탁주 샘플러에서는 찹쌀과 멥쌀로 두 번 덧술(이양주)해 빚어낸 '박봉담쌀쌀막걸리'가 쌀 본연의 복합미와 부드러운 질감을 자랑한다. 특히 1960년대 쌀막걸리를 복원한 '박봉담 옛날 막걸리'는 전통 누룩을 일반 막걸리보다 3배가량 많이 넣어 묵직하고 진한 풍미가 압권이다. 단순히 단맛만 도드라지고 걸쭉하기만 한 고급을 표방하는 막걸리가 아니라, 신맛(산미)과 감칠맛이 조화롭게 구조를 이루는 진정한 프리미엄의 기준을 제시한다.


살균 처리를 하지 않은 수제 '생백세주'의 경험도 특별하다. 도슨트 투어의 설명에 따르면, 열을 가해 맛이 둥글게 섞인 일반 살균주가 '김치찌개'라면, 생백세주는 원재료 각각의 산뜻한 특징이 톡톡 살아있는 '갓 담근 김치'와 같다.


◇ 스마트팜의 채소와 막걸리 식초…섬세한 마리아주


음식 메뉴를 들여다보면 모든 요리를 전통주와 접목하려는 고민이 묻어난다. 예를 들면 막걸리를 이용해 술 빵을 만드는 식이다.


박봉담에서 판매되는 메뉴들.

▲박봉담에서 판매되는 메뉴들. 사진=송민규 기자

테이블에 오르는 '통 버터헤드 쌈 샐러드', '치킨 에그 샌드위치' 등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단연 채소의 아삭한 신선함이다. 이 채소들은 본동 맞은편에 위치한 스마트팜 '팜업'에서 갓 수확해 바로 식탁으로 공급된 것들이다. 백상훈 팜업 본부장은 “식물 성장에 유효한 빛 파장과 양액을 세밀하게 조절해 키워내 쓴맛이 적고 식감이 부드럽다"고 설명했다.


박봉담 스마트팜 버터헤드

▲스마트팜에서 버터헤드를 재배하고 있다. 사진=송민규 기자

단품 요리들의 완성도도 빼어나다. 순두부와 리코타 치즈, 우유, 쌀이 환상적인 조화를 이루는 '순두부 리코타 타락죽'은 고소하고 깊은 풍미를 구현해낸 메뉴다. 고소한 '불고기 들기름 누들'과 향이 좋은 '참나물 감자전' 역시 전통주와 훌륭한 마리아주(Mariage·조합)를 보여준다. 겨울 한정으로 내놓았던 '부먹 술빵'은 막걸리 발효종 빵과 달콤한 팥 소스의 어우러짐이 좋았다. 샌드위치에 곁들여지는 피클조차 예사롭지 않다. 주정 없이 직접 빚은 막걸리 식초를 사용해, 튀는 신맛 대신 부드럽고 둥근 산미가 입맛을 돋운다.


◇ '어케이션'을 확장하다…무알코올이 건네는 배려


무엇보다 차를 두고 대중교통으로 방문한 여행자, 혹은 부득이하게 운전대를 잡아야 하는 동행인을 위한 세심한 배려도 돋보인다. 신우창 국순당 연구소장은 “회식은 줄어도 사람들과 어울려 즐기는 상황(Occasion) 자체는 사라지지 않기에 무알코올 라인업을 깊이 있게 연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알코올 0.00%로 쌀 본연의 깊은 단맛과 상쾌한 산미를 구현한 '박봉담 무알코올 막걸리' , 로스팅 몰트가 전하는 커피와 초콜릿 향의 묵직한 풍미를 살린 '박봉담 논알코올 스타우트' 등 선택지가 다양해 누구나 소외되지 않고 양조장의 분위기를 공유할 수 있다.


취하기 위해 부어라 마셔라 하는 요란함은 없다. 대신 정제된 공간에서 느긋하게 각자의 미각을 탐구하는 다큐멘터리 같은 하루가 남는다. 주말 오후, 화성 박봉담은 대중교통으로 훌쩍 떠나기 좋은 합리적이고 섬세한 미식 여행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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