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산 원유 수급 회복까지 난망…아직은 예의주시
유가 낮아져도…중동→한국 수입 3~4주 시차 있어
LNG·원유 설비 복구와 호르무즈 기뢰 제거도 필요
북미산 등 수급 다변화 신중…가격·설비 개조 문제
최고가격제 출구 전략도 난망…이번주 논의 본격화
▲페르시아만 호르무즈 해협 인근에서 화물선들이 항해하고 있다. 사진=로이터/연합뉴스
미국과 이란이 사실상 종전에 합의했음에도 국내 정유사들이 이후 변화가 예상되는 원유 수급부터 가격 문제에 적응하기 위한 숙제를 안게 돼 마냥 웃지 못하는 상황이 처했다.
당장 호르무즈 해협이 열려도 통항이 전쟁 전 수준으로 회복하기까지 시간이 걸리고, 안정적 원유 수급을 위한 전략을 추가로 마련해야 하기 때문이다.
내수 환경에서도 최고가격제 출구 전략이 마땅치 않은 상황에서 휘발유와 경유 등 석유제품 가격을 둘러싼 딜레마를 풀어야 하고, 국내외 석유 수급 구조와 이에 따른 공급망 변동, 자체 생산설비 최적화 같은 중장기 과제도 개선해야 하는 처지다.
15일 업계에 따르면, 정유사들은 14일(현지 시간) 미국과 이란이 종전에 합의하 원유 수급상황 변화를 예의 주시하고 있다. 미국과 이란 협상단이 오는 19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종전 서명식을 가지고 호르무즈 해협 봉쇄를 헤제하더라도 중동 지역 원유를 선박에 싣고 한국 항구로 실어오기까지 시차가 나기 때문이다.
유가 추이에는 종전 기대감이 미리 반영됐다. 전쟁 발발 직전인 지난 2월 말 두바이유 가격은 배럴당 71.2달러를 기록했지만 발발 직후부터 급격한 상승세를 타며 3월 23일 166.8달러까지 올랐다. 4월 들어 100달러선에 가까워졌지만 평년에 비하면 높은 수준을 유지했다. 그러다 6월 들어 종전 기대감이 반영되며 유가가 100달러선 아래로 떨어진 뒤 지난 12일 기준 83.2달러를 기록했다.
그러나 중동 지역에서 원유 수급 상황이 전쟁 전 수준으로 회복하기까지 시차가 생각보다 길어질 것이라는 시각이 우세하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카타르 등 중동 국가들에서 액화천연가스(LNG)와 원유 생산 시설이 파괴되는 사례가 나타난 점이 대표적인 이유다. 정확한 파괴 규모와 생산 차질 물량, 설비 복구 기간을 예측하기 쉽지 않아 짧게는 몇 달부터 길게는 1~2년까지 걸릴 수 있다는 것이다.
호르무즈 해협이 종전 직후 바로 개방되더라도 전쟁 기간 해협에 설치한 기뢰도 중동산 원유 수급 회복의 방해 요인이다. 전쟁 전에도 대형 원유 운반선이 항해할 수 있는 폭이 넓어봐야 10km 정도로 협소한데, 기뢰 때문에 기존 항로를 이용하기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업계 한 관계자는 “종전 협상을 마치고 호르무즈 해협이 재개방되더라도 유조선 통항이 전쟁 이전 수준으로 회복할 때까지 지켜봐야 하는 데다 중동에서 한국으로 원유가 들어오는 시차도 3~4주"라고 전했다.
이 관계자는 “카타르 LNG 설비처럼 중동 지역의 파괴된 원유와 가스 설비 규모 파악부터 복구까지 시간이 꽤 필요하기 때문에 유가 변동 같은 추이까지 종합적으로 고려해 대응책을 마련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지난해 기준 중동산 원유 의존도가 70% 가까이 됐던 수급 구조를 어떻게, 어느 정도로 다변화할지도 정유사들이 풀어야 할 과제다. 가장 유력한 대체 수입처로 미국과 캐나다 등 북미 지역이 부상하면서 전쟁 기간에는 북미 수입 비중을 늘렸다. 지난 4월 기준으로 수입 원유 가운데 중동산 비중은 전년 동월보다 12.1%포인트 낮아졌지만, 미국산은 215만톤으로 13.4% 증가하며 사우디와 맞먹는 수준이 됐다.
그러나 설비 구조와 경제성 등을 고려하면 섣부른 수급 다변화 결정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정유사들은 원산지별 원유 투입 비중에 맞춰 원유 정제 설비를 운영해온 만큼, 원산지별 도입 비중을 바꾸면 설비 조정 과정을 몇 달에서 1년 정도 거치며 설비 투자를 단행해야 한다.
특히 북미 지역 원유 비중을 더 늘리는 데는 신중한 분위기다. 안정적인 자원 확보라는 경쟁력을 고려하면 원산지를 다변화하는 전략을 채택해야 하지만, 북미산 원유 도입 비용이 중동산보다 더 높기 때문이다. 북미산 원유 가격이 약간 더 높은 데다 한국으로 운반하는 거리와 시간이 중동산의 2배라 운송 비용이 훨씬 더 비싸다. 원유 적재 항구가 대부분 대서양 쪽에 있는 데다 수에즈 운하를 통과하기 어려워 북미산 원유를 배에 싣고 오려면 아프리카 희망봉을 거쳐야 한다는 설명이다.
다른 업계 관계자는 “미-이란 전쟁을 겪은 정유사로서는 원유 수급처 다변화를 어떻게든 해야 하는 상황"이라면서도 “설비 조정 문제와 원가 상승 같은 부담도 있어 어느 정도로 확대할지 따질 내용이 많다"고 말했다.
물가 급등을 최소화한다는 취지로 정부가 시행해온 석유제품 최고가격제의 출구를 어떻게 마련할지도 고민이다. 이달 들어 유가가 하락하는 추세인 데다 종전이 현실화되면서 최고가격제를 종료해야 하는데, 그간 안착된 관행대로 싱가포르 석유 시장(MOPS) 가격에 연동하면 지금보다는 가격이 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2차 최고가격제부터 6차 최고가격제가 적용되고 있는 지금까지 국내 휘발유와 차량용 경유의 정유사 공급 가격은 각각 리터당 1934원과 1923원으로 고정됐다.
이에 따라, 주유소에서 판매된 전국 평균 가격도 리터당 2000원 초반을 유지했다. 그간 MOPS에 연동되지 않아 상승이 억제됐던 기름값이 최고가격제 해제 이후 오르면 생활 물가가 상승할 가능성이 크지만, 정유사 손실 보전 재원이 한정돼 있다는 점에서 최고가격제를 유지하기 쉽지 않은 상황이다. 빠르면 이번주 시작될 최고가격제에 따른 정유사 손실 보전 논의와 유가 하락으로 재고 효과가 반대로 나타날 가능성도 변수다.
이덕환 서강대 화학과 명에교수는 “원유 뿐만 아니라 LNG까지 포함해 화석 연료 기반 에너지 공급이 차질을 빚어왔기 때문에 최소한 몇 달은 전쟁 기간 겪은 수급 불안이 지속될 것"이라며 “따라서 유가가 떨어져도 개별 정유사가 내야 할 원유 도입 비용이 높아진 새 판에 적응해야 하는 시기"라고 진단했다.
이어 이 교수는 “무조건 북미산 원유를 확대하는 데 치중하는 것을 경계하고 중동산 원유를 안정적으로 수급할 전략도 마련해야 한다"며 “MOPS에 정유사 공급가를 연동해온 관행이 합리적인 국내 석유제품 가격 책정을 위해 유지됐다는 점을 고려해 최고가격제 출구 전략 마련과 국민 설득에 나설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