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르무즈 합의 막판 진통
이란, 美에 피해 배상·제재 해제 등 요구
최고안보수장에 IRGC 출신 초강경파 임명
美, 이란 스스로 무너지도록 경제난 압박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사진=AFP/연합)
호르무즈 해협을 둘러싼 미국과 이란의 합의가 여전히 교착 상태에 빠진 가운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평소와 다른 모습을 보여 관심이 쏠리고 있다. 그동안 협상 불발 시 폭격을 경고하며 이란에 합의를 압박해왔던 것과 달리 이번에는 당분간 상황을 지켜보겠다는 대응 기조를 시사하면서다.
로이터통신 등 주요 외신에 따르면 9일(현지시간) 아바스 아라그치 이란 외무장관은 호르무즈 해협 통행에 대해 오만과의 합의가 임박했다며 협상이 최종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밝혔다.
이어 “미국이 종전 양해각서(MOU)를 계속 위반하고 있다"며 “미국이 위반 행위를 멈추고 위반 사항에 대해 배상할 때까지 협상이 재개될 가능성은 없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현재 우리는 미국과 협상하고 있지 않다"며 “메시지 교환은 중재자를 통해 이뤄지고 있다"고 강조했다.
아라그치 장관은 또 호르무즈 해협 재개방을 위한 조건 가운데 하나로 미국이 이란 전역에 가한 대규모 공격으로 발생한 피해를 배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앞서 이란 측은 전날 호르무즈 해협 재개방을 위한 조건으로 미국의 대이란 해상 봉쇄 해제와 이란 주변 지역에서의 병력 철수, 전쟁 피해 배상 등 6개 요구 사항을 담은 성명을 발표했다. 이는 지난 6월 발효된 MOU보다 한층 강경해진 요구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이란이 오만과의 호르무즈 해협 재개방 합의 발표를 미루고 있는 데 대해 분노나 좌절감을 드러내지 않았다고 악시오스는 보도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악시오스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우리는 로키(low-key·절제된 방식)로 대응하고 있다"며 “우리는 그들과 절반 정도만 협상하고 있다. 엄청난 인플레이션과 돈이 없다는 현실에 직면한 이란을 그저 지켜보고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불과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이란을 상대로 대규모 군사작전을 재개하기 직전까지 갔지만 이번 인터뷰에서는 새로운 군사적 위협을 내놓지 않았다고 악시오스는 전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또 이란이 군인들에게 지급할 자금조차 없다며 미국의 해상 봉쇄가 이란 정권의 경제 위기를 더욱 악화시켰다고 강조했다. 이어 이란과의 교착 상태에 대해 “잘 해결될 것이다. 항상 잘 해결된다"며 “마치 체스 게임과 같다"고 했다.
▲호르무즈 해협(사진=AP/연합)
군사적 대응 수위를 다시 끌어올리기보다는 이란의 경제난이 심화되는 상황을 지켜보면서 이를 협상의 지렛대로 활용해 양보를 끌어내겠다는 전략으로 풀이된다.
미국의 한 당국자는 무력 충돌이 이어지는 동안 오히려 이란 정권이 전쟁에 따른 심각한 경제 위기의 현실을 직면하지 않아도 됐다고 악시오스에 말했다. 반대로 무력 충돌이 벌어지지 않는 상황에서는 이란 정권이 뚜렷한 해결책조차 없는 현실과 직접 마주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중재에 참여하고 있는 한 외교관은 호르무즈 해협 재개방을 위한 이란의 요구 사항이 강경해진 것 역시 이란 정권 내부에서 벌어지고 있는 정치적 갈등을 반영한다고 말했다.
미국 당국자들도 이란 정권 내부에서 미국과의 협상을 둘러싼 이견이 커지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고 악시오스는 전했다. 마수드 페제시키안 이란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세력은 심각한 경제난이 자칫 경제 붕괴로 이어질 수 있다며 미국과 합의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반면 아흐마드 바히디 이란혁명수비대(IRGC) 총사령관을 중심으로 한 강경파는 미국에 어떠한 양보도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이란은 이날 모흐센 레자이 최고지도자 군사고문(72)을 최고국가안보회의(SNSC) 신임 사무총장으로 임명했다.
IRGC 총사령관 출신인 레자이는 오랫동안 이란 안보 분야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맡아왔으며 과거 이란의 핵 프로그램을 더욱 진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한 대표적인 초강경파 인사다.
이에 따라 이란 내부에서 대미 강경파의 목소리에 더욱 힘이 실릴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반대로 경제난을 이유로 미국과의 합의를 지지해온 페제시키안 대통령을 비롯한 온건 협상파의 입지는 상대적으로 좁아질 가능성도 제기된다.
미국은 당장 합의가 이뤄지지 않더라도 호르무즈 해협을 통한 원유 수송을 확대하며 대응한다는 방침이다. 악시오스에 따르면 미군과의 공조 아래 매일 밤 약 800만배럴의 원유가 호르무즈 해협 남쪽 항로를 통해 걸프 지역에서 빠져나가고 있다. 미국은 합의가 이뤄지지 않는 동안 이 같은 방식으로 수송되는 원유 물량을 더욱 늘릴 계획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