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주짓수하는 여자

에너지경제신문 입력 2018.10.29 15:26

성영주 코스모폴리탄 피처 에디터


주짓수를 배우기 시작했다. ‘여자가 남자를 제압할 수 있는 스포츠’라는 별칭을 가진 호신술로 유명한 그 운동. 유도와 같은 뿌리의 맨몸 운동으로 팔다리 관절 꺾기, 목 조르기 등의 기술로 상대를 제압하는 현실 격투 성향이 강한 무술이다. 쭈뼛쭈뼛 주짓수체육관에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거친 숨소리와 땀냄새로 가득한 그곳에는 여자들도 꽤 많이 눈에 띄었다. 거기서 3년째 주짓수를 배우고 있다는 여성 간호사 이모 씨를 만났다. 그는 "지금도 밤에 골목길에서 누군가가 날 위협한다면 이길 자신은 없다. 그러나 이제는 지진 않을 자신은 있다"고 말했다. 주짓수를 배우는 대다수의 여성이 그랬다. 내가 강해져야 스스로를 지킬 수 있다는 절박함. 그렇다. 나도 나를 지킬 만한 무언가가 필요했다. 막무가내의 위협에 늘 곤두설 수밖에 없는 여자로서 말이다.

최근 충격적인 뉴스들이 들려왔다. 서울 강서구 한 아파트 주차장에서 전 남편에게 살해당한 여자, 부산에서는 30대 남성이 전 여자친구의 집에 침입해 조모부터 부모, 그리고 당사자까지 일가족을 살해했다. 한 달 전으로 거슬러 가면 한 연예인이 남자친구에게 데이트 폭력을 당한 일도 있었다. 이쯤 되니 남친에게 이별 통보하려면 주짓수부터 시작해서 복싱이나 무에타이하나 정도는 섭렵하고 난 다음에 해야 하는 거 아닐까, 의문이 피어 오른다. 이건 웃자고 하는 농담이 아니라, 순도 100%의 진지한 걱정이다.

최근 한 TV 프로그램에서 소설가 김영하가 이런 말을 했다. "한국은 익명성이 너무도 없는 사회다"라고. 우리나라가 유독 ‘아파트 공화국’으로 발전한 것은 개인의 익명성을 보장 받고 싶은 현대인의 심리가 작용했을 거라는 추측이었다. 그러나 김영하 작가의 말처럼 개인주의를 보장 받는 문화가 ‘아직도’ 자리 잡지 않았다는 대한민국이 ‘유독’ 개인 사정으로 마땅히 치부해버리는 한 가지가 있다. 바로 부부나 연인 사이에 대해서다. 부부싸움은 어찌 됐든 칼로 물 배기이고, ‘저마다 이유와 사정이 있겠지’로 곧잘 귀결된다. 이토록 완벽한 익명성이라니. 그러는 사이, 심각한 가정폭력이나 데이트 폭력도 ‘반의사불벌죄’라는 이름 하에 피해자의 의지가 있어야 처벌할 수 있는 민사 사건이 되었고, 이같은 살인사건까지 벌어졌다. 그러니까 다시 한 번 나를 지키려면 주짓수 유단자를 꿈 꿀 수밖에.

범죄심리학자 이수정 교수는 앞서 말한 강서구 부녀자 살인이나 부산 일가족 살해 사건에 대해 "두 사건 모두 전 남편과 전 남친의 스토킹이 지속돼 오고 있는 상황이었다"며 "스토킹 범죄를 대수롭지 않게 넘기거나 경미한 처벌을 함으로써 두 경우 모두 이미 예비된 살인이라고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연인에 대한 집착적 성향, 지속된 폭력, 이별 뒤 스토킹까지, 거의 매뉴얼처럼 이어져 온 엄연한 폭력이었다. 이를 향해 "부부 사이의 일은 그들만 아는 거지", "남자가 여자를 너무 좋아했나 보네" 같은 말로 등한시했던 것이 어떤 무서운 결과를 낳았는지 이제 제대로 들여다봐야 할 시간이다.

가정폭력을 포함한 모든 데이트폭력은 범죄다. 거기에 ‘그들만이 아는 그들의 사정’이 있었다고 해도, 폭력은 이미 그 사정을 뛰어넘는 범죄 행위다. 모든 남성이 잠정적인 범죄자라는 것이 아니라, 엄연한 범죄인 가정폭력을 제대로 처벌해야 한다는 의미다. 이미 선진국에서는 모든 데이트폭력은 형사 사건으로 다뤄진다. 가까운 사이에서 벌어지는 폭력이기 때문에 감안할 대상이 아니라, 더 위험한 폭력이라는 것을 인지하기까지도 이만큼이나 오래 걸렸다. 이제 법적, 제도적 장치가 이를 뒷받침하지 않는 한, 대한민국 여성들 모두가 주짓수 체육관을 찾아야 할 지도 모르는 일이다. ‘반의사불벌죄’를 폐기하지 않는 것이 ‘체육관 번창 사업’의 일환이 아니라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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