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산유국 감산확대 등 영향 WTI 연초대비 31.2% 올라
월가선 "수요 늘지만 큰 반등 없을듯…유가 소폭 하락 전망"
EIA·IEA "非OPEC, OPEC+ 감축분 상쇄…초과공급 불가피"
美셰일, 10년간 원유생산 증가분의 85%…러 생산량 웃돌아
브라질·노르웨이 등 산유국 생산량 확대도 부담으로 작용
경자년 (庚子年) 하얀 쥐의 해가 밝았다. 지난해 국제유가는 그야말로 냉온탕을 오갔다. 미중 무역분쟁이 격화되면서 글로벌 경기 침체에 대한 우려가 고조됐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지난해 국제유가가 2018년과 비교해 중동지역 정세에 크게 영향을 받을 것으로 전망했지만, 오히려 결과는 반대로 나타났다.
미국, 사우디아라비아, 이란 간의 군사적 충돌까지 빚어진 상황에서도 이와 관련된 ‘리스크 프리미엄’은 금세 사라졌다. 투자자들은 이같은 이벤트를 잊은 채 미중 무역분쟁과 글로벌 경기 둔화, 원유 수요 둔화 등을 주목했다.
특히 작년에는 미중 무역갈등이 국제유가를 가장 크게 좌우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계경제 1·2위를 차지하고 있는 양국이 협상 모드로 돌입했을 때는 국제유가도 덩달아 강세를 보였다. 그러나 ‘관세 폭탄’을 놓고 신경전을 벌일 때 국제유가는 하루기준 몇 년만에 최대수준의 하락폭을 기록하기도 했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석유수출기구(OPEC) 회원국과 러시아 등 10개 주요 산유국의 연합체인 OPEC+는 ‘감산을 통한 유가 끌어올리기’ 전략을 펼쳤지만, 연일 최고 수준의 생산량을 기록하고 있는 미국의 ‘셰일 붐’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2020년 국제유가는 OPEC+과 셰일오일을 앞세운 미국 간의 힘 겨루기 양상이 한층 더 거세질 것으로 보인다. 특히 전문가들은 올해 원유시장에 공급과잉 현항이 계속될 것으로 전망했다. <편집자주>
◇ 20% 이상 뛴 국제유가…주요 투자은행 "브렌트유 평균가격 61.23 달러"
▲2019 WTI 가격 추이 |
서부텍사스산원유(WTI)와 브렌트유는 미중 무역협상에 대한 기대감으로 작년 1분기에만 최소 30% 상승하는 등 2009년 2분기 이후 최고의 성적을 기록했다. 그러나 당초 기대치와는 달리 양국이 협상에서 별다른 타협점을 찾지 못한데다 서로에게 관세 인상 카드까지 꺼내들면서 국제유가는 하염없이 무너졌다.
미국이 지난해 5월 2000억 달러 규모 중국산 제품에 대한 관세를 25%로 인상하자 WTI는 5월 한 달 동안 무려 16% 하락했다. 중국도 미국 제품에 대한 보복관세를 매기는 등 미중 무역전쟁이 전면전으로 확산되자 WTI 가격은 지난 하반기부터 50달러 범위의 박스권에서 지지부진한 움직임 보였다. 브렌트유 역시 올해 4월까지 꾸준한 상승세를 보이며 배럴당 최고 74.57달러까지 기록했지만 트럼프발 관세 이슈로 인해 60달러 선에서 맴돌았다.
그러나 지난달 미국과 중국이 ‘1단계 무역협상’에 도달했고 공식 서명도 가질 것이라는 발표가 나오면서 국제유가는 다시 꿈틀대기 시작했다. 여기에 OPEC+가 작년 1월부터 시행한 하루 120만 배럴의 감산규모를 올해부터 총 170만 배럴로 늘리겠다는 소식에 WTI와 브렌트유가 힘입어 연초대비 각각 배럴당 61.06달러, 66.00달러에 2019년을 상승 마감했다.
WTI는 올해 31.2% 상승했으며 이는 2016년 이후 약 3년 만에 연간 기준으로 최고 상승 기록이다. 브렌트유 역시 올해 약 21%의 상승세를 기록했다. 이런 와중에 올해 국제유가는 어떤 흐름을 보일지 관심이 집중되는데 주요 글로벌 투자은행(IB)는 올해 유가가 작년보다 소폭 낮은 수준을 기록할 것으로 전망했다.
골드만삭스는 에너지 시장에 ‘의미 있게’ 충격을 주는 재료가 없는 가운데 산유국들의 추가 감산에도 브렌트유는 작년보다 낮은 수준인 63달러 수준에 그칠 것으로 전망했다. WTI 기준으로는 58.50달러를 예상했다. 글로벌 경제 여건이 올해보다 나아져 수요가 회복될 것이라는 점은 국제유가에 긍정적이나, 큰 반등을 기대하기는 어렵다는 분석이다.
모건스탠리도 이와 비슷하게 올해 1분기 브렌트유가 배럴당 62.50달러 수준을 기록할 것으로 예상했지만 이후에는 60달러로 하락할 것으로 예측했다. OPEC+의 감산은 일시적인 영향에 불과해 원유시장은 결국 과잉공급에 다시 직면하게 될 것이라는 분석이다.
JP모건은 OPEC+ 산유국들의 원유 감산과 신흥국 경제 성장 등 영향으로 WTI와 브렌트유의 평균 가격이 각각 배럴당 60달러, 64.5달러를 기록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JP모건은 미중 무역전쟁의 휴전, 일부 신흥국 경제의 악재 완화,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불확실성 해소 등으로 올해 글로벌 경기에 그나마 ‘숨통’이 트일 것으로 전망했다.
JP모건은 "지난해 9월에는 올해 국제 원유 시장이 일평균 60만 배럴 수준의 공급 과잉 상태에 놓일 것으로 예상했지만, 현재는 이보다 일평균 20만 배럴이 부족할 것으로 보고 있다"고 설명했다. 다만 JP모건은 내년 WTI 가격이 배럴당 57.50달러, 브렌트유 가격은 배럴당 61.50달러로 올해보다 떨어질 것으로 내다봤다.
해당 전문가들의 견해는 월스트리트저널(WSJ)이 지난달 주요 투자은행 13곳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와도 상당 부분 일치한다. WSJ에 따르면 올 1분기 브렌트유 평균가격은 배럴당 61.23달러를 기록하지만 연평균 기준으로는 가격이 60.65달러에 그칠 것으로 전망됐다. WSJ는 "글로벌 원유 시장에 공급 과잉이 이어지면서 산유국 감산 규모 확대로 인한 유가 상승 폭은 제한될 것으로 보인다"며 "지난달 상승세를 이어왔던 국제유가는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WTI의 경우 배럴당 55.68달러로 추산됐다.
뱅크오브아메리카는 "OPEC+ 산유국들의 감산이행률 초과달성이 미중 무역합의 등과 같이 글로벌 경기회복 신호와 맞물리면 브렌트유가 배럴당 70달러까지 뛸 수도 있다"며 낙관론을 펼쳤다.
◇ EIA·IEA "산유국 감산 의미없다…70만 배럴 초과공급"
이 가운데 미 에너지정보청(EIA)이 내놓은 국제유가 추정치가 글로벌 투자은행이 발표한 전망치를 하회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EIA가 지난달 발표한 ‘단기 에너지전망 보고서’(STEO)에 따르면 올해 WTI와 브렌트유 평균가격은 배럴당 각각 55달러, 61달러에 머물 것으로 전망했다.
보고서는 "OPEC 산유국과 러시아의 감산정책은 예상 만료기간인 3월을 넘어 1년 동안 계속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며 "산유국 감산정책에 이어 미국의 대 이란 제재, 베네수엘라 제재 등이 지속되면서 올해 OPEC의 산유량은 작년보다 더욱 감소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EIA에 따르면 올해 OPEC의 원유생산량은 작년보다 하루 50만 배럴 적은 2930만 배럴 수준을 기록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서 EIA는 미국 등을 비롯한 비(非)OPEC 산유국들의 생산량이 급증하면서 OPEC+ 산유국들의 감축분을 상쇄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국제에너지기구(IEA)도 "OPEC+ 산유국들이 모두 감산합의를 이행하고 사우디가 추가 감산을 진행하더라도 올해 1분기 원유시장은 하루 70만 배럴 규모의 초과공급이 발생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특히 ‘셰일 붐’으로 기록적인 산유량을 나타내고 있는 미국의 경우 올해 평균 원유생산량은 작년보다 일일 90만 배럴 불어난 1320만 배럴을 기록할 것으로 전망된다.
주목할 점은 주요 에너지기관은 올해 원유 수요가 지난해보다 개선될 것이라는데 무게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 EIA는 올해 원유수요가 하루 140만 배럴 증가할 것으로 예상했고, IEA와 OPEC 또한 올해 원유 수요가 120만 배럴, 108만 배럴 증가할 것으로 전망했다. 지난해 원유수요가 하루 100만 배럴 이하였던 점을 고려하면, 올해 수요는 작년보다 눈에 띄게 나아질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글로벌 원유시장은 여전히 공급 과잉 상태에 빠질 것이라는 분석이다.
키움증권의 김유미 연구원은 "OPEC+의 감산 확대는 유가상승 요인으로 작용하기 보다는 유가의 하단을 지지하는데 그칠 것으로 보인다"며 "이를 바탕으로 올해 연평균 국제유가는 배럴당 55달러 선을 기록할 것"이라고 말했다. 라이스타드 에너지의 석유시장 연구팀장인 비르나르 톤하우겐도 "OPEC+ 감산결정은 공급과잉 사태를 완벽하게 해결하기 보다는 임시적인 조치에 더 가깝다"며 "올해 1분기 이후 원유시장은 공급과잉에 다시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밖에 감산에 합의한 산유국들이 감산이행률과 관련해 계속해서 갈등을 빚을 가능성도 있다. 수요 측면에서는 세계 경제를 짓누른 미중 무역전쟁이 계속해서 글로벌 원유 시장에 불확실성으로 작용할 전망이다.
그러면서 EIA는 "올 하반기부터는 계절적 요인 등으로 원유재고가 줄면서 유가가 반등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 앞으로 원유시장 계속 위협하는 ‘미 셰일오일’
글로벌 원유 시장에 공급 과잉 현상을 불러일으키는 최대 주범은 단연 미국이다. 미국의 산유량은 올해도 기록적인 수준을 이어갈 것으로 전망된다. 미국은 이미 지난 2018년 사우디를 제치고 세계 최대 산유국으로 부상했다. 미 경제매체 CNBC에 따르면 미국은 작년 11월 사상 최고치인 하루 약 1300만 배럴의 원유를 생산했다.
미국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작년에는 원유 생산을 더 늘려 마침내 석유를 순수출하는 나라가 됐다. EIA에 따르면 미국은 지난해 9월 하루 9만 배럴 이상의 원유를 순수출했다고 밝혔는데 이는 통계를 작성하기 시작한 과거 1949년 이후 70년 만에 월간 기준으로 처음 순수출국이 된 것이다. 그동안은 주간 기준으로 순수출 사례들만 있었다.
미국은 이러한 흐름에 힘입어 올해는 연간 기준으로도 원유 순수출국이 될 것으로 보인다. EIA는 올해 원유 평균 순수출량이 하루 57만 배럴에 이를 것으로 예상한 반면 원유 평균 순수입량은 하루 49만 배럴에 그칠 것으로 전망했다.
심지어 IEA는 미국의 ‘셰일 붐’이 예상보다 더 오래 지속될 것으로 내다봤다. OPEC+가 감산규모를 더욱 늘리거나 원유에 대한 수요가 대폭 증가하지 않는 한 원유 시장이 공급 과잉 현상은 해소되기 어려울 것으로 전망된다.
IEA는 지난달 발표한 ‘2019년 세계 에너지 전망(World Energy Outlook 2019)’ 보고서에서 "미 셰일의 성장률은 예전에 비해 다소 주춤할 것으로 보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2030년까지 세계 원유 생산 증가분의 85%를 차지할 것"이라고 말했다. IEA는 또한 "2025년까지 미국의 총 셰일 생산(셰일오일+셰일가스) 규모가 러시아의 생산량을 웃돌 것"이라고 전망했다. 보고서는 2030년 미국의 원유생산량이 하루 1600만 배럴까지 올라갈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파티 비롤 IEA 사무총장은 "글로벌 원유시장의 재균형을 이루기 위한 노력이 미 셰일로 인해 상쇄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에 따라 원유시장에서 OPEC과 러시의 입지는 더욱 좁아질 전망이다. 실제 IEA에 따르면 글로벌 원유생산량에서 OPEC과 러시아가 차지하는 비중이 2005년까지만 해도 54%에 달했다. 그러나 그 비중이 작년에는 49%로 줄었고 2030년에는 47%로 더 떨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원유시장의 균형을 잡으려는 OPEC의 노력이 지속적으로 역풍을 맞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IEA는 원유수요 전망에 대한 불확실성과 환경 문제, 셰일 업체들의 수익성 문제 등으로 생산량이 좌우될 수도 있다고 분석했다.
한편, 미국을 제외한 기타 비OPEC 산유국들이 원유생산량을 꾸준히 늘리고 있는 점도 원유시장에 부담이다. 산유국인 브라질의 경우 지난해 11월 하루평균 원유생산량이 사상 처음으로 300만 배럴을 넘어섰다. 종전 기록인 지난 8월의 298만 9000 배럴을 3개월 만에 경신했다. 국영 석유기업 페트로브라스는 심해유전 개발로 브라질의 석유 생산량 순위가 현재 9∼10위에서 10년 후에는 5위권에 들어갈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브라질 대서양 연안에서는 해저 3500∼5500m에 형성된 염전층을 기준으로 하부 유전(pre-salt)과 상부 유전(post-salt)이 있다. 본격적인 심해유전 개발은 10년 전 남동부 에스피리투 산투 주에 속한 주바르치 광구부터 시작됐으며, 현재 유전 개발을 위해 설치된 플랫폼은 20개를 넘는다. 심해유전 개발 비용이 최근 5년 사이에 70% 가까이 감소한 것으로 나타나면서 페트로브라스가 심해유전 개발을 서두르고 있다.
이와 관련 비롤 사무총장은 로이터와의 인터뷰를 통해 "미국, 브라질, 노르웨이 등 비 OPEC 산유국에서 원유생산량이 증가할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OPEC과 러시아는 강하게 압박을 받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에너지경제신문 박성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