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E칼럼] 국제정치질서 재편과 자원안보 위기

에너지경제신문 입력 2022.04.03 10:00

박진표 법무법인 태평양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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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표 법무법인 태평양 변호사


"그대의 부드러운 날개가 머무르는 곳에서 모든 인간은 형제가 되노라!"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해인 1989년 12월 25일 레너드 번스타인의 베를린 공연 이후 전세계를 향해 힘차게 울려 퍼져 왔던 ‘자유의 송가’를 우리는 이제 더 이상 들을 수 없게 될까.

올해 베이징 동계 올림픽 직후 벌어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크렘린이 러시아-유럽간 지정학적 세력 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국지전 수준에 그칠 것이라는 대부분의 예상을 이미 깨버렸다. 미국은 우크라이나에 막대한 규모의 첨단무기를 지원하는 데에서 더 나아가 이번 침공을 기화로 강경한 대러 경제제재를 통해 러시아를 아예 봉쇄하려 들고 있다.

미국 주류 정치인들과 언론은 소련 붕괴로부터 30여 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러시아를 잠재적 적성국가로 보아 왔다. 그러고 보면 트럼프 전 대통령에 대한 1차 탄핵소추도 러시아의 대선 개입 논란에서 발단되었다. 그리고 유럽국가들은 러시아에 대한 에너지 의존도 축소와 군비 증강을 추진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번 전쟁의 조기 종전 여부와 관계없이 ‘역사의 종언’으로 언표되어 왔던 자유주의 국제정치질서가 소용돌이 속에 재편될 것임은 분명하다. 마치 2차 세계대전 승전 이후 서로 어정쩡한 관계에 있던 자본주의국가들과 공산주의국가들이 한국전쟁을 계기로 냉전이라는 양극체제에 편입되었던 것처럼, 이번 전쟁은 미국을 필두로 하는 자유주의 진영과 러시아와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권위주의 진영으로 국제정치질서를 재편할 것이라는 예측이 나오고 있다.

이러한 세계정세의 변화는 그간 세계의 번영을 이끌어온 자유무역체제에 심대한 악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특히 석유·가스·광물 수출대국인 러시아의 글로벌 경제에 대한 접근을 차단하는 것은 러시아뿐만 아니라 유럽을 비롯한 미국의 우방 경제에도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는 자충수라는 우려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러 봉쇄를 감행하는 미국의 자신감은 셰일가스 개발을 통해 원유 순수출국이 되었다는 사실에 기인하였을 것이다. 미국의 노르트스트림 2 프로젝트 견제과정에서 명확하게 드러난 것처럼, 미국의 에너지 독립은 우방 국가들의 경제를 적성국가의 손에서 떼어내어 자신의 품 안으로 들여야 한다는 결론을 자연스럽게 만들었다.

이런 점에서 이번 침공의 근본적 원인을 서방이 우크라이나의 NATO(북대서양조약기구) 가입을 통해 역내 세력 균형을 깨뜨리려 했던 데에서 찾은 공격적 현실주의자 미어샤이머 시카고대 교수조차도 어쩌면 이번 사태의 일면만을 파악한 것일지 모른다. 미국은 일본에 대해 1941년 석유 등 전략물자 수출금지 등 봉쇄조치를 내림으로써 그레이트 게임 당시 대러 견제 역할을 벗어나 중국과 동남아까지 침입한 일본제국을 패망의 길로 이끌었다.

미어샤이머 교수가 어느 인터뷰에서 말한 것처럼 맹수같은 초강대국은 한번 일어난 일을 망각하는 법이 없는 이상, 금세기 대제국의 엘리트들은 각종 봉쇄조치를 통해 이번 기회에 영원한 적수를 옐친의 시대로 되돌리는 것이 제국의 사활적 이익(existential interest)을 위해 필요하다고 판단했을 수 있다.

이렇듯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베일 뒤에 숨겨진 국제관계의 냉혹함은 평평한 세계 위에 구축된 기존 글로벌 공급망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있다. 국제정치질서의 재편과 더불어 무역망 역시 미국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다. 미국의 제조업 리쇼어링(reshoring) 정책도 이런 맥락에서 오래 전부터 면밀하게 준비되었을 것이다.

비록 러시아가 이번 전쟁에서 승리하더라도, 러시아가 단기간 내에 미국 세력권에 필적하는 무역망을 우호국에 구축하지 못한다면, 러시아 그리고 그 세력권에 편입된 국가들의 운명은 밝지 않을 것이다. 세계는 그 운명의 빛이 언제 꺼질지 지켜보는 이리떼로 넘쳐난다.

이러한 국제질서의 재편이 장기적으로 우리나라에게 생존적 위기가 될 것인지 국가부흥의 기회가 될 것인지는 우리의 선택과 대응에 달려 있다. 이를 위해 급변하는 국제정치질서와 무역망 하에서 우리나라의 생존을 위해 국가안보의 관점에서 에너지와 자원을 장기적·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한 정책이 마련돼야 함은 당연하다.

다만 지금 당장의 현실에서는 에너지를 비롯한 자원 부문에서 국제질서의 균열이 초래한 자원안보위기라는 전대미문의 쓰나미가 우리 목전에 다가왔음이 분명하게 목격되고 있다. 안타깝지만, 자원을 해외 수입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하는 우리가 이 쓰나미를 막을 방법은 전혀 없다. 따라서, 국가 차원에서 자원안보위기에 대응하여 불요불급한 에너지와 자원의 소비를 억제하고 에너지와 자원을 확보하기 위한 대책이 시급하게 마련되어야 한다.

그 첫 단추가 전기요금 인상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만약 정부가 정치적 목적으로 이를 회피한다면, 이는 전력공급체계의 작동방식에 걷잡을 수 없는 파국을 연쇄적으로 초래할 수 있음을 유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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