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왼쪽)이 2022년 12월8일 사우디아라비아 수도 리야드에서 실권자인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 겸 총리를 만났다. 이후 두 나라 관계는 빠른 속도로 가까워지고 있다. 사진=로이터/연합뉴스 |
중동의 맹주 사우디아라비아가 또 미국의 뒤통수를 쳤다. 사우디 입김이 가장 센 석유수출국기구 플러스(+)가 추가 원유 감산을 결정했다고 2일(현지시간) 외신이 일제히 보도했다. 감산량은 하루 최대 116만배럴 규모다. 이 중 50만배럴이 사우디의 몫이다. 그 바람에 국제 기름값이 다시 꿈틀댔다. OPEC+는 지난해 10월에도 200만배럴을 감산했다.
작년 봄부터 미국은 물가를 잡으려 금리를 급하게 올렸다. 그 바람에 실리콘밸리은행(SVB)이 파산하는 등 금융시장이 휘청했지만 물가를 잡으려는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이 마당에 원유 추가 감산은 미국에 제대로 한방 먹인 꼴이다. 고물가 늪에 빠진 다른 나라에도 원유 감산은 악재다.
◇ 뒤틀린 미국-사우디 관계
사우디의 ‘반란’은 예전 같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사우디는 중동 내 미국의 최대 우방국이다. 미국이 원유 증산 신호를 보내면 고분고분 따랐다. 사우디는 1986년부터 달러당 3.75리얄에 환율을 고정시켰다. 자연 리얄화 가치는 달러 가치에 연동된다. 그만큼 두 나라 경제는 밀접하게 얽혀서 돌아간다. 세계 석유 무역은 대부분 달러로 결제된다. 이를 통해 미국은 달러 패권을 유지했다. 사우디는 그 대가로 미국이 제공하는 안보 우산 아래서 평화를 누렸다.
지난 2018년, 그러니까 5년 전에 튀르키예 이스탄불에 있는 사우디 총영사관에서 살인사건이 벌어졌다. 사우디 반체제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가 잔혹하게 살해됐다. 배후 인물로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 왕세자가 지목됐다. 카슈끄지는 미국에 머물며 워싱턴포스트(WP)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대선 유세에서 인권을 탄압하는 사우디를 ‘파리아(Pariah)’ 취급하겠다고 약속했다. 파리아는 인도 카스트 제도에서 가장 낮은 불가촉천민을 가르킨다. 한국 언론은 보통 ‘왕따’로 번역한다.
이 사건 이후 미-사우디 관계는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빈 살만 왕세자 겸 총리는 사우디의 실권자다. 그런 사람을 암살 배후로 몰았으니 두 나라 관계가 좋을 리가 없다.
작년부터 세계 경제에 인플레이션 먹구름이 몰려왔다. 국제 기름값도 껑충 뛰었다. 어쩔 수 없이 바이든 대통령은 작년 7월 ‘왕따’ 공약을 어기고 사우디로 가서 왕세자를 만났다. 바이든은 사우디가 원유 증산으로 인플레이션 압력을 낮추는 데 협조할 것을 요청했다. 웬걸, 사우디는 거꾸로 갔다. 바이든이 떠나고 3개월 뒤 OPEC+는 일 200만배럴 감산을 결정했다. 그 통에 국제 유가가 뛰면서 비OPEC 석유수출국으로 우크라이나와 전쟁 중인 러시아가 혜택을 입었다. 인플레이션 고삐를 죄려던 미국의 계획도 차질을 빚었다. 당시 미국은 "후과가 있을 것"이라며 사우디에 경고장을 날렸으나 엄포에 그쳤다.
이번 116만배럴 추가 감산에 대해서도 바이든 대통령은 "OPEC의 감산이 생각만큼 나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후과’는커녕 사우디를 자극하지 않으려 애쓰는 모습이 역력하다.
◇ 틈 비집고 들어선 중국
![]() |
▲중국은 3월10일 베이징에서 중동의 두 앙숙인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의 외교관계 복원을 주선했다. 가운데는 중국 외교를 총괄하는 왕이 공산당 정치국원. 사진=로이터/연합뉴스 |
사우디도 믿을 구석이 생겼다. 바로 중국이다. 바이든이 떠나고 다섯달 뒤인 작년 12월 시진핑 국가주석이 사우디를 찾았다. 사우디는 누구 보란 듯이 시 주석을 성대하게 환영했다. 미국에 끌려다니던 사우디는 ‘차이나 카드’를 새로운 무기로 장착했다.
이후 두 나라는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지난달 사우디는 중국이 주도하는 정치·경제·안보 동맹인 상하이협력기구(SCO)에 합류하기로 했다. SCO는 2001년 중국과 러시아의 주도로 출범한 다자협의체다. 지난달 중순엔 중국 수출입은행이 사우디에 무역대금 결제용으로 위안화 대출을 실시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이른바 ‘페트로 달러’에 맞설 ‘페트로 위안’ 구상이 첫 발을 뗀 셈이다.
더 놀랄 일은 지난달 사우디와 이란이 외교 관계 복원에 전격 합의했고, 이를 중국이 주선했다는 점이다. 사우디는 이슬람 수니파, 이란은 시아파의 맹주로 사사건건 얼굴을 붉히는 사이다. 두 앙숙 사이에 중국이 다리를 놓았다. 사우디와 이란은 성명에서 "회담을 주선한 중국 지도자들과 정부에 사의를 표한다"고 말했다. 미국은 팔짱을 끼고 이를 지켜보는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었다.
◇ 한·사우디 관계도 영향을 받을까
![]() |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해 11월 17일 방한한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 겸 총리와 회담을 마친 뒤 오찬을 함께 하고 있다.사진=연합뉴스 |
지난해 11월 빈 살만 왕세자가 방한해 윤석열 대통령을 만났다. 윤 대통령은 한남동 관저의 첫 손님으로 왕세자를 맞는 등 극진하게 대접했다. 왕세자는 ‘사우디 비전 2030’이라는 대형 프로젝트를 추진 중이다. 사막에 첨단 신도시를 건설하는 네옴시티는 그 일환이다. IT 기술 선진국인 한국도 핵심 파트너국가 중 하나로 꼽힌다.
사우디는 미국과 거리를 두고, 중국과 가까워지려고 한다. 이렇게 되면 한국에도 영향이 있을까? 큰 우려는 하지 않아도 좋을 듯하다. 한국은 사우디가 상대하기에 편한 나라다. 초강대국 미국이나 중국처럼 버겁지 않다. 게다가 한국은 첨단 기술력을 갖추고 있다.
국방 분야에서도 두 나라가 손잡을 공간이 넓다. 지난달 7일 칼리드 빈 살만 사우디 국방장관이 윤 대통령을 예방했다. 윤 대통령은 사우디를 ‘중요한 경제·안보 파트너’라고 부르며 "한국은 사우디와 방산 협력을 적극적으로 추진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4일 연합뉴스는 군사전문 매체 제인스닷컴 등을 인용, "사우디아라비아군에 한국의 천무 다연장로켓(MLRS)이 배치된 모습이 확인됐다"고 보도했다.
한국은 2030 세계박람회 유치를 놓고 사우디, 이탈리아, 우크라이나와 경쟁하고 있다. 한국과 사우디가 접전을 벌일 것으로 보인다. 박람회 유치는 각자 최선을 다하면 그만이다.
틀어진 미-사우디 관계는 국제 정치에선 영원한 우방도, 영원한 적도 없다는 걸 여실히 보여준다. 한방 먹은 미국이 어떤 식으로 사우디를 다잡을지 지켜보는 것도 흥미롭다. 국제 정치를 지배하는 기준은 첫째도 국익, 둘째도 국익, 셋째도 국익이다.
[경제칼럼니스트]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