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우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안전공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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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우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안전공학과 교수 |
위험성평가에서 빈도와 강도 추정은 필수적인 절차다. 이것을 빼면 더 이상 위험성평가라고 할 수 없다. 그리고 위험성 추정에 대한 기준을 제시하지 않겠다는 것은 자의적인 위험성평가를 방치하거나 조장하겠다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는 공부 못하는 자녀에게 공부를 잘하도록 지도해 성적을 끌어올릴 생각은 하지 않고 자녀의 학습역량을 의심하고 지레 포기하게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자녀도 부모의 체념에 편승하여 학습하는 것을 자포자기할 것이다. 이런 부모의 태도에 자녀는 당장은 좋아할지 모르지만, 성인이 되어선 일찌감치 못난 자식 취급하고 방치한 부모를 원망하지 않을까.
이번 행정예고안의 또 다른 큰 문제점은 위험성평가에 대한 잘못된 신호를 준다는 점이다. 현재 대기업에선 위험성평가가 부실하다는 문제의식 정도는 다 가지고 있다. 그런데 행정예고안은 이런 생각마저 사라지게 할 수 있다.
정부가 지금 해야 할 일은 위험성평가가 제대로 작동되도록 구체적인 방법·기준과 작업별 모범사례를 개발해 배포하는 등 위험성평가의 인프라를 대폭 확충하고 강화하는 것이다. 이런 노력을 열심히 해도 모자랄 판에 위험성평가 기준을 대폭 완화하겠다니, 도무지 납득할 수 없다. 행정예고안에서 강조하는 노동자 참여의 실효성에도 많은 문제가 있다. 노동자 참여가 마치 목적인 것처럼 획일적으로 강조되고 있기 때문이다. 정보 수집과 유해위험요인 파악방법, 위험성 추정방법 등에 대한 세부 기준이 제시되지 않으면 노동자 참여가 형식으로 흐르면서 현장감독자와 전문가의 참여를 되레 위축시킬 수 있다.
위험성평가를 작업(공사) 개시 후 1개월 이내에 하라는 것도 위험성 평가의 본질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위험성평가는 작업(공사) 개시 전에 실시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데 공사가 시작되고 나서 실시할 경우 효과는 반감될 수 밖에 없다. 정부가 제도개편을 하면서 이런 기본적인 사항마저 제대로 못 짚은 것은 국제기준과 외국법제에 대한 기본적인 조사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방증한다. 노동계뿐만 아니라 경영계도 반대하는 퇴행적인 제도개편을 밀어붙이려는 저의가 뭔지 자못 궁금할 뿐이다. 위험성평가 정책의 허점은 이뿐만이 아니다. 안전보건공단은 현재도 부실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위험성평가 인정 비율의 목표를 뜬금없이 예년보다 2배 가량 높게 잡았다. 사업을 내실화하는 것에는 관심 없고 단순히 물량을 확대하는 것에 급급한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산재예방 행정이 덩치는 거구가 됐지만 전문성은 예전보다도 못하다는 세평이 자자하다. 모름지기 산업안전과 같은 전문성이 요구되는 문제에서 정책이 효과를 거두기 위해선 전문성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선의에 찬 우행은 악행으로 통한다. 아무리 의도가 좋아도 전문성으로 뒷받침되지 않으면 의도와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정부는 최근 많은 산업안전 대책을 쏟아내고 있지만 대부분이 의욕만 앞세운 설익은 대책 일색이다. 그 바람에 산업현장은 큰 혼란에 빠져 있다. 어설픈 정책의 피해는 고스란히 노동자에게 돌아간다. 노동자는 정책의 실험 대상이 아니다. 정교하고 신중한 접근이야말로 정책의 미덕임을 새삼 강조하고 싶다. 일찍이 공자는 "잘못하고도 고치지 않는 것, 이것이 진짜 잘못이다"고 갈파했다. 현명한 사람은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고 고치지만, 미련한 사람은 변명하고 합리화함으로써 두 번 잘못을 저지른다. 정부가 어느 길을 택할지 두고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