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인찬 경제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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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인찬 경제칼럼니스트 |
"사마란치 IOC(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장이 불어로 ‘쎄울 꼬레아!’를 선언했다. 모두, 너나할 것 없이 얼싸안았다. 얼싸안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의 득표는 나의 예상 46표에 여섯 표나 추가된 52표였다." 현대(차)그룹 창업주 정주영이 쓴 회고록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에 나오는 얘기다. 1981년 한국은 독일 바덴바덴에서 열린 IOC 총회에서 일본(나고야)을 52대 27로 꺾고 서울올림픽 유치에 성공했다. 그 맨 앞에 정주영 유치준비위원장, 아니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이 있었다. 국민들은 기적을 만든 정 회장과 기업인들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재계의 ‘맏형’ 전경련의 전성기였다.
박근혜정부 아래서 전경련은 암흑기를 맞았다. 국정농단의 조력자로 전락했고, 존폐의 기로에 섰다. 삼성, 현대차, SK, LG 등 4대 그룹이 줄줄이 탈퇴했다. 몇 몇 총수는 홍역을 치렀다. 후임을 찾지 못해 허창수 회장이 여섯 차례 연임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적폐 청산을 외친 문재인 정부는 전경련을 대놓고 패싱했다.
윤석열 정부가 들어선 뒤 전경련이 기지개를 켜고 있다. 윤석열 대선 캠프에 몸담았던 김병준이 지난 2월 회장 직무대행을 맡았다. 그는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지역균형발전특별위원장을 지냈다. 지난 3월 한·일 정상회담, 4월 한·미 정상회담에서 전경련은 오랜만에 존재감을 드러냈다.
김 회장 대행은 지난주 혁신안을 내놨다. 단체명을 62년 전 창립 당시 이름인 ‘한국경제인협회’로 바꾸고, 윤리경영위원회를 설치하고, 한국경제연구원을 통합해 싱크탱크 기능을 강화하는 게 골자다. 김 회장 대행은 "그동안 정부 관계에 치중하는 가운데 역사의 흐름을 놓쳤던 부분을 통렬히 반성한다"고 말했다.
혁신안을 총평하자면, 미안하지만, 감동과는 거리가 멀다. 간판 바꿔다는 건 우리나라 정당이 늘 하는 일이다. 그런다고 달라진 건 없다. 윤리경영위원회를 두면 과거 미르재단 모금처럼 회원사 등을 떠미는 일이 과연 사라질까? 전경련이 싱크탱크 기능을 강화한다는 말은 이미 귀에 딱지가 앉을 만큼 들었다.
전경련은 정경유착의 검은 그림자를 떨쳐내지 못했다. 혁신의 출발점은 당연히 탈정치화가 돼야 한다. 그런데 현 정권과 가까운 외부인사가 혁신을 주도하고 있다.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차기 기업인 회장은 아직 오리무중이다.
변신이 진심이라면 전경련이 꼭 해야 할 일이 있다. 무엇보다 기업을 넘어 나라 전체를 생각하는 경제단체로 거듭나야 한다. 김 회장 대행은 "경실제민(經實濟民) 철학에 입각해 국가에 도움이 되고 국민에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으로 이름을 바꿨다"고 말했다. 사실 경제라는 말 자체가 경국제민 또는 경세제민에서 나왔다. 제민이란 백성을 구제한다는 뜻이다.
기업은 돈 벌고 일자리만 만들면 된다고? 30년 전이라면 맞는 얘기다. 지금은 다르다. 투자의 귀재로 불리는 미국 워런 버핏은 부자한테 세금을 더 물리라고 주장한다. 그래야 시장경제의 부작용을 줄일 수 있고, 그래야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소득 양극화 고질병을 앓고 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임금 격차는 심각한 수준이다. 이를 외면하면 존경받는 기업, 기업인이 될 수 없다.
노조에 대해서도 좀더 대범한 자세가 바람직하다. 불법을 용인하자는 얘기가 아니다. 다만 지금처럼 전경련이 매양 노조와 으르렁대는 모습은 보기에 민망하다. 노조 대응은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에 맡기는 게 낫다. 대기업을 대표하는 단체라면 무게감이 남달라야 한다.
전경련은 지난주 집권 국민의힘 지도부를 초청해 정책을 건의했다. 내용은 안 봐도 비디오다. 상속·법인세 등 세금 내려달라, 노조법 개정안(노란봉투법)을 재검토해달라, 중대재해처벌법상 경영책임자 범위를 명확하게 해달라 등 모두 10개 항이다.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전경련이 정부와 정치권에 대고 하는 소리는 오십보백보다. 오로지 기업 이익만 내세우면 자잘한 이익단체와 다를 바 없다.
김 회장 대행은 "통렬히 반성한다"고 말했다. 진심이라면 삼성 등 4대 그룹에 재가입을 압박해선 안 된다. 행여 ‘한일 미래파트너십 기금’에 출연을 강요해선 더더욱 안 된다.
국민과 야당, 심지어 노조가 깜짝 놀랄 전경련 연구보고서를 보고 싶다. "이 보고서가 전경련에서 나온 거 맞아?"라는 말이 나올 정도는 돼야 한다. 그래야 진짜 재계의 맏형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