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호 가천대학교 에너지시스템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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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호 가천대학교 에너지시스템과 교수 |
우리나라의 여름은 고온다습하다. 근래 들어서는 폭염이 더 잦아지고 강도도 세지고 있다. 올해도 장마와 폭염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기후온난화로 6월부터 때 이른 더위와 폭염이 닥치며 냉방기간이 점점 길어지고 있다. 사무실이나 가게는 에어컨을 가동한지 이미 오래다. 그러나 일반 가정에서의 에어컨 사용은 아직도 적지 않는 부담이다. 폭염에 견디기 어려울 때는 도리가 없지만 가능하면 에어컨 가동을 줄이고 선풍기로 대신하는 경우도 많다. 전기요금이 부담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전기요금은 OECD 국가 중 상당히 낮지만 주택용은 아직도 누진제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가구당 월평균 전기사용량은 300kWh 정도다. 이 중 2인 이상 가구의 월 전기사용량은 250∼500kWh로 전기요금이 대략 월 4만∼5만원이 든다. 에어컨을 1대를 매일 4시간 정도 가동할 경우 전기사용량이 두배 가까이 늘어나고 여러 대를 가동하면 더 늘어난다. 이렇게 되면 여름철에는 가구당 전기사용량이 500kWh에서 많게는 1200kWh 까지 늘게 된다. 월 400kWh를 사용하는 일반가구에서 에어컨 2대를 매일 사용하면 전기요금은 22만원으로 늘어난다. 전기 사용량은 2배가 조금 넘게 느는 데 비해 요금은 4배로 늘어나는 불합리한 구조다. 주택용 전기요금의 누진제는 과거보다는 단계가 많이 축소됐지만 아직도 사용량이 많아질 수록 구간별로 kWh당 120원, 215원, 307원으로 높아지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전력사용량이나 피크수요 기여도가 훨씬 높은 업무용이나 산업용은 계시별 또는 단일요금이다. 아무리 많이 써도 사용량에 따른 단가는 동일하다. 여름철에 빌딩이나 상가에서의 과도한 냉방기 가동도 이런 요금구조와 무관하지 않다. 문제는 주택용에만 지금까지도 누진제를 적용해야하는 당위성이나 효과를 찾기 어렵다는 것이다. 누진제로 인해 주택용 전력소비는 줄어들겠지만 이 보다는 국민들의 불편과 불합리한 비용부담으로 인한 부작용이 훨씬 크다.
재화나 서비스 가격은 수요와 공급에 영향을 받는다. 수요가 공급보다 많으면 가격이 오를 것이고 반대면 내려갈 것이다. 전기도 마찬가지다. 냉난방 수요가 높아지는 여름철이나 겨울철에는 연료비가 높고 효율이 낮은 비싼 발전소까지 가동해야 하므로 한계비용, 즉 가격이 높아지게 된다. 따라서 수요가 많은 피크시간대에 요금을 높이고 반대일 때 요금을 낮추는 것은 이런 수급여건에 부합한다. 우리나라의 전기 수요패턴은 여름철에는 평일 오후부터 일몰전후까지, 겨울철에는 저녁시간대에 수요가 집중돼 공급비용이 높다. 따라서 이 시간대를 제외하면 수요가 높지 않고 공급비용도 낮아지게 된다. 최근 여름철 전력수요는 평일 주간시간대 8400만 kW를 넘나들고 있지만 토요일이나 일요일은 평일에 비해 전력수요가 1000만 kW 이상 줄어든다. 최근 태양광 설비의 영향으로 피크 발생시간이 다소 불규칙하지만 대체로 저녁 8시 이후에는 전력수요가 줄기 시작한다.
주택용 냉방수요는 대체로 가족이 모이는 평일 저녁시간대와 공휴일에 많다. 이 시간대는 전력설비에 여유가 있어 공급비용이 낮은 시간대에 해당한다. 주택용 냉방수요가 늘더라도 전력수급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뜻이다. 주택용 요금구조는 전력설비가 남아돌 때는 사용하지 못하고 오히려 부족할 때 사용하게 하는 꼴이다, 수급여건과 비용에 부합되는 요금체계가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렇게 된다면 에어컨 사용에 따른 주택용 전기사용 행태나 요금 부담도 지금과는 많이 달라질 것이다. 주택용에도 실시간요금제나 계시별 요금제가 적용되면 여름철에 ‘요금폭탄’에 대한 부담이 줄어들 것이다. 우리나라는 오래전부터 업무용과 산업용에는 계시별 요금제를 적용하고 있다. 10여년 전 부터는 주택용에도 시간대별 계량이 가능한 AMI 미터기가 보급되고 있다. 마음만 먹으면 빠른 시일 내에 전력수급과 공급비용을 반영한 합리적인 요금체계로 전환할 수 있다.
주택용 요금체계의 개선에 따른 효과는 크다. 첫째, 합리적인 전력소비가 이뤄진다. 구호만으로 소비억제를 외치기보다는 전력수급 여건이 투영된 요금신호를 통해 합리적인 소비를 유도할 수 있다. 설비가 빠듯해 공급비용이 높을 때는 수요를 억제하고, 설비여유가 많은 시간대로 소비를 유도하는 요금정책이 필요하다. 둘째는 국민의 불편이 줄고 에너지 사용으로 인한 편익이 높아진다. 주택용 수요는 다소 늘어나겠지만 전력수급에는 오히려 도움이 된다. 셋째는 소비자 요금의 형평성 문제 해소다. 전력설비가 부족할 때 공장가동을 위해 일반가정의 에너지 절감을 강요하던 시대는 이미 옛날 얘기다. 불합리하고 경제논리에 부합하지 않는 소비자간 차별적인 요금구조를 더 이상 지속할 이유가 없다. 마지막으로 진화하는 전력에너지시스템에 맞춰간다. 에너지 절약도 무원칙한 방식에서 벗어나 실시간이나 시간대별 요금으로 합리적인 소비반응을 유도해야 한다. 맹목적으로 주택용 전력사용을 규제하는 방식으로는 에너지절감도, 전력수급 정상화도 달성하기 어렵다. 분산에너지, 에너지프로슈머, 섹터커플링 등 전력산업의 변화와 사회경제적 발전에 부합하는 전력시스템 운영과 함께 요금구조를 손질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