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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한 예브게니 프리고진 바그너그룹 수장 생전 모습.AP/연합뉴스 |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 보복설 등 프리고진을 둘러싸고 끊이지 않던 신변 우려가 결국 현실이 된 것이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러시아 재난 당국은 23일(현지시간) 텔레그램을 통해 "모스크바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향하던 엠브라에르 레가시 제트기가 트베리 지역의 쿠젠키노 주변에 추락했다"며 "초기 조사 결과 승무원 3명을 포함해 탑승한 10명 전원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쿠젠키노는 모스크바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 방향으로 약 300㎞ 떨어진 지역이다.
러시아 항공 당국은 "프리고진과 드미트리 우트킨이 해당 비행기에 탑승했다"고 밝혀 프리고진 사망 사실을 확인했다. 그와 함께 숨진 드미트리 우트킨은 프리고진 최측근으로서 그와 함께 바그너그룹을 설립한 것으로 알려졌다.
친(親)바그너 텔레그램 채널 그레이존도 프리고진이 이번 사고로 숨졌다고 밝혔다. 앞서 그레이존은 프리고진 생존 가능성을 제기했으나 이후 입장을 바꿨다.
특히 그레이존은 러시아군 방공망이 바그너그룹 전용기를 격추했다고 주장했다. 일부 현지 매체들도 이륙 후 30분도 안 돼 해당 비행기가 방공망에 요격됐다고 보도했다.
AP 통신은 항적 추적 데이터를 근거로 바그너그룹 소유로 등록된 비행기가 이날 저녁 모스크바에서 이륙한 지 몇 분 후에 비행 신호가 끊어졌다고 보도했다.
또 추락한 비행기 사진에서 포착된 숫자와 표식 등이 과거 촬영된 바그너그룹 전용기와 일치했다고 덧붙였다.
로이터는 현지 매체를 인용해 프리고진과 우트킨 등 일행이 사고에 앞서 모스크바에서 국방부와 회의를 가졌다고 전했다.
프리고진은 ‘푸틴의 칼잡이’로 불릴 만큼 푸틴에게 충성스러운 인물이었으나 반란 뒤 ‘푸틴의 적’으로 돌아선 인물이다.
이에 서방에서는 그의 죽음에 어떤 형태로든 푸틴이 연루됐을 것이라는 추측이 제기된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이번 사고와 관련해 보고를 받고 "실제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지만 난 놀랍지 않다"며 "러시아에서 푸틴이 배후에 있지 않은 일은 별로 일어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프리고진은 푸틴의 고향이기도 한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출신으로, 그곳에서 푸틴 대통령과 인연을 맺었다.
그는 1981년 강도·사기 등의 범죄로 9년간 복역한 뒤 1990년 소련이 붕괴하는 와중 출소했다. 출소 뒤에는 핫도그 장사로 밑천을 마련한 뒤 러시아 각지에 고급 레스토랑을 열었다.
프리고진은 당시 상트페테르부르크 하급 관료였던 푸틴 대통령을 손님으로 만나 친분을 쌓았다.
프리고진은 이 인연을 계기로 크렘린궁에서 열리는 각종 만찬과 연회를 도맡으면서 ‘푸틴의 요리사’로 불렸다.
그는 2014년 용병기업 바그너그룹을 창설하면서 본격적으로 대통령 신임을 얻기 시작했다.
바그너그룹은 크림반도 강제 병합을 위한 전쟁과 시리아, 리비아, 수단 등 세계 곳곳의 분쟁에 러시아군 대신 개입하면서 세력을 키웠다.
오랜 기간 음지에서 활동하던 프리고진이 세상에 등장한 건 우크라이나 전쟁이 한창이던 지난해 9월이다.
프리고진은 당시 성명을 내고 바그너그룹을 창설한 사실을 처음으로 공식 인정했다.
서방 관계자들은 우크라이나 전쟁에 바그너그룹 용병 5만명이 투입됐으며, 이중 러시아 교도소에서 모집한 죄수들이 4만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한다.
다만 프리고진은 전쟁 중 군부 인사들이 무능하고 비협조적이라고 비난하면서 수뇌부와 갈등을 일으켰다.
세르게이 쇼이구 국방장관은 이를 진압하기 위해 6월 10일 모든 비정규군에 국방부와 정식 계약을 체결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갈등을 증폭시킨 꼴이 됐다.
재계약을 거부한 프리고진은 이후 6월 23일 무장반란을 일으키며 러시아 본토로 진격했다.
반란은 러시아가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벨라루스 대통령 중재를 통해 프리고진이 벨라루스로 철군하는 조건으로 그와 병사들을 처벌하지 않기로 합의하면서 36시간 만에 일단락됐다.
한편, 프리고진처럼 ‘의문의 죽음’을 맞이한 ‘푸틴의 적’은 이미 많았다.
2006년 6월 발생한 ‘홍차 독살 사건’이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이는 영국으로 망명한 전직 러시아 연방보안국(FSB) 요원 알렉산드르 리트비넨코가 한 호텔에서 전 동료가 전해준 홍차를 마시고 숨진 사건이다.
문제의 찻잔에서는 자연 상태에서 존재하기 어려운 방사성물질인 폴로늄이 발견됐다. 생산·유통·보관이 극도로 어려운 독성 물질이 사망 요인으로 지목됐다는 점에서 러시아 당국 연루 의혹이 강하게 일었다.
같은 해 10월 7일에는 야권 지도자였던 안나 폴릿콥스카야가 자택으로 가는 아파트 계단에서 총에 맞아 숨진 채 발견됐다. 사망일은 푸틴 대통령의 생일이기도 했다. 그는 러시아군 체첸 주민 학살을 고발했던 언론인 출신이다.
2013년에 발생한 러시아 올리가르히(신흥재벌) 보리스 베레조프스키 사망 사건 역시 의문사로 남아 있다. 영국으로 망명했던 베레조프스키는 런던 부촌의 자택 욕실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그는 자신의 자동차에 설치된 폭탄이 폭발해 운전사가 숨지는 등 여러 차례 암살 위기를 넘긴 적도 있다.
2015년에는 보리스 넴초프 전 총리가 모스크바 한복판에서 괴한들의 총에 맞아 숨졌다.
지난해 9월에는 러시아 최대 민영 석유업체인 ‘루크오일’의 라빌 마가노프 회장이 모스크바 병원에서 추락사했다. 그는 우크라이나 침공에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hg3to8@ekn.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