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희철 법무법인 명륜 파트너 변호사

▲양희철 법무법인 명륜 파트너 변호사
올해 초 열린 세계가전전시회(CES 2024)의 주인공은 단연 인공지능(AI)이라고 할 만했다. 많은 국내 기업들이 참여해 역대 최다 혁신상을 받기도 했다. 무엇보다 혁신상을 받은 국내 기업 가운데 상당수가 중소벤처기업들이라 그 의가 크고 미래가 더욱 기대된다. 이번 CES 2024 행사 현장에서 확인할 수 있었던 것처럼 이제 인공지능은 특정 분야만이 아니라 전 산업 분야에서 기존 기술과 결합해 생산성을 향상시키고, 우리 삶을 보다 풍요롭고 윤택하게 만드는 보편적인 도구로 쓰이고 있다.
이처럼 인공지능이 점차 산업과 국민 생활의 필수재로 자리잡는 추세지만 인공지능을 직접 개발하는 업체나 인공지능을 도입해 업무를 하는 기업들이 아직 제대로 수익을 내지는 못하고 있다. 특정한 기술이 개발되고 상용화되어 실제 매출로 이어지기까지는 일정한 수요가 창출되어 시장이 형성되어야 하는데, 아직 그 단계에 이르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세계적으로 인공지능에 폭발적인 투자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인공지능이 미래 경제와 안보 등 국가와 기업의 경쟁력을 결정할 핵심 요소로 평가받기 때문이다.
이제 막 새싹이 나기 시작한 인공지능 산업은 화려한 꽃을 피울 때까지 많은 정책적,재정적 지원이 필요하다. 특히 자체적으로 수익이 나지 않는 상황에서 민간 투자만이 아니라 국가적 차원에서 육성에 힘을 쏟아야 한다. 민간 투자는 수익을 목적으로 하고, 투자 이후 빠른 회수를 기본으로 한다. 이제 막 시장이 형성되기 시작하는 인공지능 산업에 민간기업, 특히 자금력이 취약한 중소벤처기업들이 장기적인 안목에서 투자를 하기에는 본래 성격에 맞지 않는 측면이 있다. 결국 정부가 큰 그림을 그리고, 멀리 보면서 지원을 하는 역할을 맡아야 한다.
이런 필요성에도 불구하고 최근 정부의 움직임을 보면 인공지능 산업에 대한 체계적인 지원 정책이 존재하는지 의문이 들게 한다. 지난해부터 과학기술계의 큰 반발을 불러왔던 예산을 살펴보면 올해 연구개발(R&D)분야 국가예산은 2023년(31조 1000억원) 대비 15% 삭감된 25조 9000억원으로 최종 의결이 됐다. 전년도 대비 과학기술 연구개발비 예산이 삭감된 것은 1991년 이후 33년만에 처음이다. 국가 부도 위기였던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당시에도 국가 경쟁력 확보를 위해 유지했던 예산을 줄인 것이다.
정부의 연구개발비 예산이 대규모로 삭감되면서 정부의 지원을 받거나 공공기관과 공동으로 과제를 수행하던 인공지능 관련 중소기업이나 학계 연구자들은 직격탄을 맞았다. 이미 계약이 체결되어 수년에 걸쳐 진행하던 과제의 예산을 갑자기 줄이자는 협약 변경을 요구받거나 신규 연구개발 과제가 시작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 것이다.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협약 변경의 조건이다.
큰 틀에서 보면 연구개발 예산 삭감은 15% 정도지만 개별 연구과제에 있어서는 그 편차가 극심하다. 정부 산하기관과 체결된 계약에 따라 수년간 수행하고 있는 과제를 갑자기 예산이 삭감되었다는 이유로 적게는 30%, 많은 경우는 심지어 80%까지 기존 계약 내용보다 금액을 낮춰서 변경 계약을 요구받고 있다. 이미 체결된 계약에 맞춰 연구 인력을 채용하고, 시설과 장비를 구매했는데 이 정도 비율로 계약 금액을 변경한다는 것은 사실상 제대로 된 과제 수행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이다.
자금력이 충분하지 않은 중소벤처기업들은 변경되는 계약 조건을 수용하지 않으면 대금 지급을 하지 않겠다는 일방적인 통보에 울며겨자먹기 식으로 어쩔 수 없이 변경을 받아들이기도 한다. 그나마 변경되는 계약대금에 맞춰 과제 범위를 축소할 수 있다면 다행이다. 때로는 기존 과제 범위는 유지한 채 계약대금 변경을 수용하라는 강요를 받기도 한다. 변경에 동의하지 않아 계약을 해지하면 향후 정부 과제 선정에 불이익을 줄 수도 있다는 은근한 압박을 덧붙인다. 사정 변경에 따른 합리적인 수준의 변경 계약을 넘어 기업 간에서라면 불공정거래에 해당할 수 있는 사안이다.
이것이 바로 정부가 연구개발비 예산을 삭감하면서 지원을 확대하겠다고 밝힌 인공지능 분야 현장에서 현재 일어나고 있는 상황이다. 명확한 실체를 알 수 없는 과학기술 연구비 카르텔을 잡는다는 명목으로 휘두른 칼에 실제로는 대한민국의 미래를 열어갈 인공지능 산업과 연구개발이 고사할 위기다. 정부가 앞에서는 인공지능 산업을 지원한다고 말하면서도 뒤에서는 자라나는 새싹을 자르고 있는 셈이다.
정부는 인공지능을 이용하는 국민의 권리를 보호하는 감독자 역할을 하는 한편으로 과도한 규제로 인공지능 산업의 발목을 잡지 않도록 후원자 역할도 해야 한다. 불필요한 규제 개선으로 뒤에서 밀어주고, 연구개발 지원을 통한 육성책으로 앞에서 끌어주는 인공지능 산업에 대한 정부의 실질적인 지원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