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스팅하우스 시공능력 부족…양국 정부, 한국에 넘기는 방안 협의 중인 것으로 알려져
미국서 ‘한국형 원전 완공’하거나 ‘기 제작한 원자로를 체코·폴란드 공동 해외진출’가능성도
UAE 사례처럼 타 국가 원전 수출 시 한-미 협력으로 추진할 경우 가능성 더 높아질 듯
유일 원전 주기기 제작 업체인 두산에너빌리티 비롯 국내 원전 생태계 활성화 기대감
한국과 세계 최대 원전기업으로 평가되는 미국 웨스팅하우스의 관계 개선은 물론, 한국 기업의 미국 내 원전 건설사업 수주 가능성에 청신호가 켜졌다는 평가가 나와 주목된다.
8일 웨스팅하우스 내부 소식에 정통한 한 관계자는 “최근 한국과 미국 정부가 웨스팅하우스의 시공 능력 부족으로 미국에서 추진 중인 원전 공사를 한국 기업에 넘기는 방안을 협의 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
웨스팅하우스는 현재 미국 조지아주에 보글(Vogtle)원전 3,4호기와 사우스캐롤라이나주에 썸머(Summer)원전 2,3호기를 건설 중이다. 보글 원전은 올해 준공 예정이지만, 썸머 원전은 수차례 지연된 끝에 중단된 상태다.
이 관계자는 “웨스팅하우스가 해당 원전용으로 만들고 있던 원자로와 터빈 등 주기기를 남겨놨다가 수출할 때 쓰려고 하는데, 이 기기들은 한국 기업인 두산에너빌리티에서 제작해 보관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 “주기기 외에 나머지 건설 부문도 한국 업체들에게 넘겨 미국 내에서 완공을 하거나 여의치 않을 경우 폴란드나 다른 동유럽 국가로 수출할 계획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주기기를 만들어 놨다며 세일즈를 하고 있다. 이 부분에서 한국 업체들과 협력을 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해당 주기기는 한국형 원자로 APR 1400로 알려졌다. APR1400은 웨스팅하우스가 인수한 미국 CE의 '시스템 80' 디자인을 바탕으로 제작된 것으로 알려졌다. 웨스팅하우스가 한국형 원전 기술에 대한 자사의 지식재산권(IP)을 꾸준히 주장해온 배경이다.
웨스팅하우스 측은 지적재산권 문제제기와는 별도로 최근 수년간 한국을 찾아 해외 시장 개척을 위해 한국전력과 한국수력원자력 등 전력·원자력 기업들을 방문한 바 있다. 업계에선 웨스팅하우스가 한국 쪽에 원전 공정 관리나 건설·기계 분야의 협력을 요구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원전 설계 관련 원천기술을 보유하고 있지만 경영 성과가 좋지 않은 웨스팅하우스로서는 원전을 꾸준히 가동·운영하며 관리 노하우를 축적해온 한국 원전 운영사와 건설업체들의 협력이 절실할 수 있다는 분석이다.
이에 업계에서는 한국의 원전 수출을 둘러싸고 웨스팅하우스가 제기한 지적재산권(IP) 분쟁이 일단락되고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정동욱 중앙대 에너지시스템공학부 교수는 “한·미 원전은 동유럽 시장 등에서 서로 경쟁하면서도 협력해야 하는 미묘한 관계, 즉 형과 동생 같은 관계"라며 “한국이 독자 기술로 국외 원전시장에 진출하면 좋지만, 기술 특허 소송 등의 논란이 커질 우려가 남아있는 것도 사실이다. 서로 협력할 분야를 조율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정범진 경희대 교수는 “미국은 설계 등의 분야에서 원천기술을 갖고 있고, 우리나라는 시공이나 기자재 분야에서 강점이 있다. 양국의 강점을 토대로 협력하는 모델이 가능할 것"이라며 “UAE(아랍에미리트연합) 바라카 원전에 한국과 미국이 공동으로 참여한 것과 비슷한 수준으로 진행되는 게 '윈-윈'"이라고 관측했다.
그는 “현재 폴란드 신규 원전 6기 수주는 웨스팅하우스가 가장 유리한 상황이라고 들었다. 아직 한 기도 확정이 안됐다"면서 “다만 정작 웨스팅하우스가 제대로 지을 수 있을지는 의심스럽다. 2018년 도산해 캐나다 사모펀드에 인수될 당시 자국인 미국에서도 완공을 못하고 있는 기업"이라고 말했다.
정부에서도 웨스팅하우스와의 협력 등을 기대하는 분위기다.
산업통상자원부 관계자는 “원전 강국인 미국 기업과 우수한 기자재 공급망과 더불어 바라카 원전 1호기 상업 운전을 성공시킨 우리 기업 간에 최적의 해외원전 공급망을 갖추게 되면, 수주경쟁력 제고와 양국 원전 생태계 강화에도 크게 기여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이어 “한미가 처음부터 공동으로 컨소시엄을 구성해 신규 원전 수주에 뛰어들기보다 둘 중 어느 국가가 수주하더라도 그 나라 사업에 참여하는 형식을 함께 고려해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미국은 웨스팅하우스사와 GE(제너럴일렉트릭)를 앞세워 미국형 원전건설을 추진하면서 경쟁력 강화를 위해 한국과 협력하고자 한다"면서 “미국과 연합팀을 구성하면 수출 때 타국에 대한 경쟁력 우위를 점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웨스팅하우스는 1950년대부터 미국에서 가장 많은 원전을 건설하고 전 세계 원전 가운데 절반 가까이에 원천기술을 제공한 원전건설의 대명사다. 한국 첫 상업용 원전인 고리1호기 건설도 웨스팅하우스의 기술전수로 시작됐다. 우리나라 고리 1·2·3·4호기, 한빛 1·2호기는 웨스팅하우스가 설계한 원자력 발전소다. 설계도와 원천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이를 기초로 우리나라가 만든 한국형 APR1400 원자로 도입 발전소가 한빛 3·4·5·6호기, 한울 3·4·5·6호기, 신고리 1·2호기, 신월성 1·2호기 12개 발전소다. 이 발전소들에 대한 설계 원천 재산권(IP)도 웨스팅하우스가 갖고 있다. 이후 신고리 3·4 호기부터 도입된 APR1400은 우리나라가 이를 기반으로 독자적으로 만든 발전소다.
일본 반도체 기업 도시바는 지난 2006년 원전 시장이 더욱 성장할 것이란 판단 아래 웨스팅하우스를 54억 달러에 인수했다. 당시 우리나라 두산중공업(현재 두산에너빌리티)도 32억 달러 정도에 입찰을 시도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2011년 후쿠시마 대지진 이후 세계적으로 원전 안전 기준이 강화되면서 미국·유럽 등 각국에서 공사가 지연되고 시공 비용이 늘어난 것으로 전해졌다. 이 여파로 웨스팅하우스는 2017년 3월 약 7조1250억원에 달하는 손실을 냈다고 발표, 미국 연방 파산보호법 11조에 따라 파산보호 신청을 냈고 2018년 캐나다 사모펀드인 브룩필드비즈니스파트너스에 인수됐다.
한 원전업계 관계자는 “웨스팅하우스는 우리나라를 포함한 전 세계 원전의 모든 설계기반 자료를 다 보유하고 있는데다 사후 관리 사업권까지 가지고 있다"며 “사실상 세계 민간 원전에 대해 가장 영향력이 큰 회사"라고 말했다.
그는 “이게 우리나라와 경쟁관계에 있는 국가나 회사에 매각되면 우리나라에는 당연히 악영향"이라며 “러시아나 중국에는 팔지 않을 가능성이 크고 프랑스 EDF라는 회사가 가장 적극적인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만약 EDF가 웨스팅하우스를 매수한다면 우리나라는 아마 체코와 폴란드를 비롯한 해외 원자력 수출 사업은 거의 못할 가능성이 크다"며 “지금 정부에서 하고 있는 2030년까지 원전 10기 수출도 웨스팅하우스 인수가 키(Key)가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관계자는 또 “현재 웨스팅하우스는 폴란드나 영국 등 우리와 경쟁하고 있는 유럽 원전 수주에서 상당 부분 앞서고 있다"며 “우리가 웨스팅하우스와 협력을 강화하거나 혹은 인수한다면 자연히 수주에도 힘이 실릴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정부 관계자는 “웨스팅하우스를 인수하면 국제 원자력 시장에서의 강자가 될 수 있는 기회인 것은 분명하다"면서도 “다만 지금 국내 한 기업이 인수하기에는 어려울 것 같다. 국가적으로 협력 강화를 시도해 보면 될 게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