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E칼럼] 전력망 위기 극복, 국가적 대타협이 필요하다

에너지경제신문 입력 2024.10.31 10:58

하윤희 고려대학교 에너지환경대학원 교수

하윤희

▲하윤희 고려대학교 에너지환경대학원 교수

대한민국의 전력망이 한계에 다다랐다. 산업 발전과 친환경 에너지 전환이라는 두 가지 도전 과제를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전력망 인프라는 이미 포화 상태다. 재생에너지 발전 비중이 늘어나면서 전력망 운영의 복잡성은 더욱 증가하고 있으며, 곳곳에서 송전제약이 발생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외적 압박마저 가중되고 있다. EU는 2023년 10월부터 CBAM을 시행하고 있으며, 미 의회에서 준비 중인 탄소규제 법안들은 더욱 광범위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미 의회에서 논의 중인 청정경쟁법(CCA)과 외국오염부과금법(FPFA)은 EU CBAM이 철강, 알루미늄 등 6개 부문에 국한된 것과 달리, 석유화학, 식품첨가물, 플라스틱 등을 포함한 광범위한 산업군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여기에 EU 공급망실사법(CSDDD)까지 발효되면서 글로벌 기업들은 협력사들에게 RE100 달성은 물론, 탄소배출, 환경영향, 인권 등을 포함한 전반적인 지속가능성 입증을 요구하고 있다. 이는 완제품 제조기업뿐만 아니라 공급망 전반에 걸친 중소·중견기업들에게 큰 부담이 되고 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재생에너지 발전사업자들은 심각한 송전제약에 직면해 있다. 발전은 가능하지만 전력을 보낼 수 없는 상황이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 송전선로 부족으로 계통 연결을 대기 중인 태양광 발전소의 용량만 10.9GW로, 이는 원전 11기에 맞먹는 규모다. 이러한 상황이 더욱 심각한 것은 전력망 문제가 갈수록 악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재생에너지 발전설비는 2023년 기준 24.9GW로 2017년 대비 4배 증가했다. 문제는 이 중 약 70%가 전남·경북 등 특정 지역에 집중되어 있다. 송전망이 이러한 급격한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면서 계통 연결 지연이 심화되고 있다. 더욱 우려되는 것은 전력망 확충을 책임지고 있는 한전이 대규모 부채로 적극적인 투자가 어려운 실정이라는 대목이다.


전기요금 통제로 인한 적자 누적은 필수 인프라 투자마저 위협하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전국 곳곳에서 발생하는 송전설비 증설에 대한 님비 현상은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상황이 단순한 기업 차원의 대응으로 해결될 수 없다는 점이다. 재생에너지 발전단지를 구축하고 싶어도 송전망 부족으로 계통연계가 불가능하고, 산업단지 내 자가발전 설비를 설치하려 해도 기존 전력망의 용량 제약에 막히는 상황이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결국 전력망 문제는 개별 기업의 생존을 넘어 국가 산업 경쟁력의 문제가 되고 있다.



이제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전력망은 더 이상 한전 혼자 감당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도로, 철도와 마찬가지로 국가 핵심 인프라로서 정부의 직접적인 재정 투자가 필요한 시점이다. 미국이 인프라 투자 법안을 통해 대규모 전력망 투자를 진행하는 것이나, 독일이 에너지 전환을 위해 송전망에 대규모 국가 투자를 단행한 것은 좋은 선례가 될 수 있다. 한편, 송전설비 확충에 대한 지역사회의 반발 문제도 새로운 접근이 필요하다. 독일의 사례처럼 지역주민들과 함께하는 전력 인프라 구축 방안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단순한 일회성 보상을 넘어, 지역사회와의 지속가능한 협력 방안을 논의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국회는 지역 간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는 중심 역할을 고민해볼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새로운 형태의 사회적 대화가 필요하다. 지역별로 전력 생산자, 송전설비 인근 주민, 수혜 기업, 지방정부가 참여하는 '지역 전력망 협의체'를 통해 지역 내 대화, 지역 간 대화를 통한 대타협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이 모든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식의 전환이다. 전력망은 특정 지역이나 집단의 문제가 아닌, 우리 모두의 문제다. 산업 경쟁력과 일상생활을 지탱하는 핵심 인프라인 전력망의 확충 없이는 우리의 미래도 없다. 전기를 사용하는 모든 국민이 이 문제의 당사자이며, 해결의 주체라는 인식이 필요하다.




전력망 문제는 단순한 기반시설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 존립의 문제다. 반도체, 이차전지 등 우리의 주력산업이 도약하기 위해서는 안정적인 전력 공급이 필수적이다. 탄소중립이라는 시대적 과제 역시 튼튼한 전력망 없이는 달성할 수 없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전력망의 공공재적 가치를 인식하고, 이를 위한 사회적 비용 분담에 합의하는 것이다. 정부의 과감한 투자, 기업의 책임 있는 참여, 지역사회와의 진정성 있는 소통이 어우러질 때, 우리는 이 난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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