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사이트] 조지프 나이의 ‘소프트파워’꿈을 무너뜨린 트럼프 시대

에너지경제신문 입력 2025.05.26 11:02

성일권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발행인

성일권

▲성일권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발행인

얼마 전, 미국의 대표적 국제정치학자 조지프 S. 나이가 세상을 떠났다. 그는 “힘이 아니라 매력과 설득으로 세상을 움직인다"는 소프트파워 개념을 정립한 인물이다. 국제정치의 언어가 군사력과 경제제재 같은 하드파워 일변도였던 시대, 나이는 미국이 세계의 존경과 신뢰를 받기 위해 지켜야 할 새로운 좌표를 제시했다. 그가 꿈꾸었던 미국은 '민주주의'의 가치를 내세우는 부드러운 문화국가였다. 인권, 민주주의, 관용이라는 가치를 스스로 실천하며, 이웃국가들을 억압하지 않고 모범으로서 세상을 이끄는 국가였다. 그러나 그의 타계는 아이러니하게도, 미국이 스스로 그 이상을 저버리고 있는 순간과 겹쳤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취임과 동시에 소프트파워의 기반을 뒤흔들었다. 그는 동맹국을 모욕하고, 이민자를 사냥하며, 미국의 외교적 신뢰를 스스로 허물었다. 그가 해체한 USAID(국제개발처)는 지난 수십 년간 미국의 인도적 이미지와 글로벌 영향력을 지탱해온 상징적 기구였다.


트럼프에게 설득과 모범은 의미 없는 수사(修辭)이다. 그의 세계관에서 힘은 협박과 거래, 무력을 통해서만 작동한다. 조지프 나이가 말했던 소프트파워는 더 이상 미국 외교의 중심이 아니다.



그럼에도 조지프 나이의 유산을 이어가려는 이들은 남아 있다. 빌 게이츠는 대표적이다. 그는 지난 25년간 자신의 부를 공공보건과 빈곤퇴치에 쏟아부으며, 민간 차원의 소프트파워를 실천했다. 2025년 5월, 게이츠는 자신의 재산 99%를 게이츠 재단에 기부하고, 2045년까지 재단을 해산하겠다고 선언했다. 같은 날, 미국인 출신의 교황 레오 14세가 선출되었다. 그 역시 세계적 책임을 고민하며, 부유국의 의무를 강조하는 지도자로 주목받고 있다. 이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조지프 나이가 옹호했던 '설득의 힘'을 지켜내고 있다.


그러나 세계는 이미 소프트파워를 밀어내고, '검열파워'의 시대로 진입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트럼프가 표현의 자유를 외치면서도 흑인 전투기 조종사의 역사 교육을 금지하고, 팔레스타인을 지지하는 유학생들을 추방 대상으로 삼았다. 미국 정부 웹사이트에서는 '다양성', '젠더' 같은 단어가 사라졌다. 유럽도 예외는 아니다. 프랑스에서는 시온주의 비판을 법적으로 금지하자는 논의가 진행 중이고, 유럽연합은 러시아 국영 매체의 방송을 금지했다. 루마니아에서는 러시아 개입 의혹을 이유로 특정 대선 후보가 결선 진출에서 배제되었으며, 독일은 '네트워크 집행법'을 통해 소셜미디어 검열을 제도화했다.




표현의 자유를 수호한다는 명분 아래, 오히려 표현을 억압하는 이중적 현실. 검열은 더 이상 권위주의 정권의 전유물이 아니다. 민주주의를 자처하는 국가들조차 검열의 유혹에 빠지고 있다. 19세기 프랑스 제3공화국 시기의 검열을 풍자한 캐릭터 '아나스타지의 가위'는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불편한 표현을 자르고 통제하려는 충동은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문제는 이런 충동이 장기적으로 더 큰 불편과 억압을 초래한다는 점이다.


조지프 나이는 설득과 모범의 힘을 믿었지만, 지금 세계는 권력의 이름으로 표현을 자르고, '진실'이라는 이름으로 이견을 억누른다. 한쪽의 검열은 다른 쪽의 복수를 부르고, 그 악순환 속에서 결국 사라지는 것은 우리 모두의 자유다. 조지프 나이의 경고, 오늘의 우리에게


조지프 나이가 남긴 소프트파워의 가치는 단지 외교 전략이 아니다. 그것은 민주주의의 본질, 자유사회의 근본 원칙과 맞닿아 있다. 힘이 아니라 매력으로, 강압이 아니라 설득으로 세상을 바꾸려는 시도는 민주주의가 존재하는 한 결코 사라져서는 안 될 유산이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세계는 그 유산을 밀쳐내고 있다. 검열의 칼날이 점점 날카로워지는 시대, 조지프 나이의 꿈은 우리에게 묻는다.


“힘이 아닌 설득으로, 우리는 여전히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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